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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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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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브리아와 마르케 주(州)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원(中原)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각종 외족이 번갈아 혹은 동시에 출몰하면서 이탈리아는 300여 년간 천하대란의 시기를 맞는다. 샤를마뉴의 평정도 일시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진공상태는 다시 여러 백년을 지속한다. 이 기간 북에서 흥한 세력은 이 지역을 통해 내려왔고 남에서 일어난 세력은 이 지역을 거쳐 밀고 올라갔다. 롬바르드족, 아틸라의 훈족, 신성로마제국군(軍) 들은 전자의 경우고, 시칠리아에서 흥기한 호헨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페데리코) 2세나 체사레 보르자의 군대는 후자의 사례다. 일종의 정치적 무주(無主) 지역이었던 셈이다. 이 틈새에서 11~12세기가 되면 장사나 싸움으로 입신한 대소 가문들이 각지에 생겨나고 이들이 주도하는 자치도시들이 일어난다. 공화국이건 군주국이건 강한 도시가 약한 도시들을 상대로 확장을 거듭한다. 이렇게 정리된 이탈리아의 정치 판도는 르네상스의 기운이 무르익는 1450년경이 되면 대개 다섯 나라의 병립을 보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의 큰 도시로 남아 있는 로마(교황령), 나폴리(왕국), 베네치아(공화국), 피렌체(공화국), 밀라노(공국) 등이다. 소위 ‘르네상스 5패(五覇)’다. 움브리아와 마르케를 포함해 오늘 우리가 돌아보려는 로마냐 일대는 이 시기 이후 교황 통치령(Stato Papale)이 된다. 세 지역의 역사적인 마을들과 그 맹주(盟主) 역할을 했던 대소 가문들의 소장(消長)은 중세사에 빼놓을 수 없는 얘깃거리다. ‘르네상스 5패’가 주연으로 출몰하는 무대의 배경 속에 나름대로 명멸하며 많은 유·무형의 유산을 남겨 주었다. 페루자의 발리오니(Baglioni), 카메리노의 바라노(Varano)와 같이 한두 세대를 못 넘긴 가문도 많지만, 볼로냐의 벤티볼리오(Bentivoglio), 리미니의 말라테스타(Malatesta)같이 상당 기간을 한 지역의 군주로 행세한 사례가 적지 않다. 페라라의 에스테(Este),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Montefeltro)처럼 기백년의 장수를 기록하며 이탈리아 역사뿐 아니라 유럽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대소 자치도시는 16세기가 되면 대개 교황령으로 흡수되어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통일까지 가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된 이탈리아의 정치 판도는 르네상스의 기운이 무르익는 1450년경이 되면 대개 다섯 나라의 병립을 보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의 큰 도시로 남아 있는 로마(교황령), 나폴리(왕국), 베네치아(공화국), 피렌체(공화국), 밀라노(공국) 등이다. 소위 ‘르네상스 5패(五覇)’다.
1406년(태종 6년)에는 병조좌랑으로 있으면서 대궐 갑사(경호요원)를 구타했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 또 순군옥에 갇혔다. 1415년(태종 15년) 6월에도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승문원 지사로 명나라에 보낼 문서에 날짜 표기를 잘못해 우리도 잘 아는 부교리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의금부 감옥에 내려졌다. 정인지와 마찬가지로 학재(學才)는 뛰어났지만 관리로서의 이재(吏才)는 약했던 것이다. 물론 사안이 그리 심각하지 않아 두 사람은 나흘 만에 원래 직책으로 복귀하기는 했다. 그 때문인지 한달여 후에 태종이 가장 신뢰했던 하륜(河崙)이 밀봉한 글을 올려 “윤회는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여 대언이 될 만하다”고 하니 태종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 즉위년(1418년)에 윤회가 동부대언으로 발탁됐다는 점이다. 이때 주요 인사는 상왕인 태종이 할 때이니 실은 아들 세종을 잘 보필할 신하로 윤회를 눈여겨 보아 두었다가 뽑아 올린 것이다. 당시 태종이 윤회에게 한 말이다. “경은 학문이 고금을 통달했으므로 세상에 드문 재주이고, 용렬한 무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니 경은 부디 힘쓰라.” 이 무렵 세종은 제왕학 수련 기간이었는데 경연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읽은 책이 《대학연의》였고 그 핵심 진강자가 바로 윤회였다. 대를 이어 조선왕실에 이 책을 강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다시 술이 문제가 된다. 사헌부에서 윤회가 종묘에서 예를 행하는데 술에 취해 불경을 저질렀다고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종은 윤회를 불러 꾸짖었다. “너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술 마시기를 도에 넘치게 하는 것이 너의 결점이다. 이제부터 양전(兩殿)에서 하사하는 술 이외에는 과음하지 말라.” 실은 윤회를 감싸 안아 준 것이다. 그후 세종은 윤회에게 술을 석 잔 이상 못 마시도록 했다. 이에 윤회는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자 세종은 “내가 오히려 술을 더 권한 셈이 됐다”며 웃었다. 줄곧 외교문서를 관장했고 세종의 큰 배려 속에 병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세종 18년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계유정란의 피바람 속에 어떤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참고로, 신숙주(申叔舟)는 윤회의 장남 윤경연(尹景淵)의 사위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 즉위년(1418년)에 윤회가 동부대언으로 발탁됐다는 점이다. 이때 주요 인사는 상왕인 태종이 할 때이니 실은 아들 세종을 잘 보필할 신하로 윤회를 눈여겨 보아 두었다가 뽑아 올린 것이다. 그 때문인지 한달여 후에 태종이 가장 신뢰했던 하륜(河崙)이 밀봉한 글을 올려 “윤회는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여 대언이 될 만하다”고 하니 태종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거대도시 서울에는 많은 기업이 몰려 있다. 서울은 ‘새 천년 기회의 땅’이다. 그러나 서울이 안고 있는 풍수지리학적 문제는 산처럼 쌓여 있다. 기업은 민간의 경쟁력과 창의력으로 성장한다. 정치는 기업의 경쟁력을 떠받치는 다른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 우리가 흔히 박정희 전 대통령을 5000년 가난에서 해방시킨 지도자로 평가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하겠다. 지도자가 아무리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어도 첨병인 기업의 능력이 없으면 지도자의 꿈은 헛꿈에 불과하다. 기업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총수의 음택과 양택이 두루 좋아야 하고 본사 건물이나 주요 산업 현장에도 생기가 넘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업 활동에서 터의 중요성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도 역시 터가 중요하다. 우리가 흔히 정치를 4류라고 비웃지만 정치의 온상인 국회의사당과 청와대가 생기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일이 매우 시급한 과제이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풍수지리학은 공익을 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국가 행정부의 위치를 어디에 놓느냐는 국운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조선의 이씨 왕조는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선대 임금들을 명당 진혈에 모시는 데 실패한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국왕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약체 정권이 많았다. 임금의 묘뿐만이 아니다. 정권의 향배를 명확하게 판가름하는 궁궐의 배치에도 고스란히 이러한 사정이 드러난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의 건립 터를 놓고서는 승려인 무학(無學)과 성리학자인 정도전(鄭道傳)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무학은 인왕산 아래를 주장했다. 정도전은 그러나 무학에 반대하여 삼각산 아래를 주장했다. 궁궐은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정해졌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웠으면 다시 채우면 된다. 하지만 궁궐을 다시 짓는 것은 국력을 소진하는 작업인지라 함부로 결정할 일이 못된다. 구한 말 쇠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경복궁을 중수하다가 경제적 난관에 빠지게 되었다. 당백전으로 중수 비용을 조달하다가 결국 나라 살림을 거덜 낸 일이 아득한 옛 얘기가 아니다. 조선 개국 당시 무학 대사는 풍수 등의 이유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국가적 재앙을 이미 예언했다. 풍수에 대한 무학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대가는 너무 컸다.
지도자가 아무리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어도 첨병인 기업의 능력이 없으면 지도자의 꿈은 헛꿈에 불과하다. 기업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총수의 음택과 양택이 두루 좋아야 하고 본사 건물이나 주요 산업 현장에도 생기가 넘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업 활동에서 터의 중요성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나제(羅濟)싸움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지상건축물은 오직 하나. ‘정림사지(定林寺址) 석탑’이었다. 파괴의 회오리 속에서도 당나라 소정방(蘇定方·592~667)이 그 탑 하나만 남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저 석탑을 없애지 말라! 탑에 비문을 새기겠다”고. 제1층 석면에 ‘내가 백제를 멸했다’란 말을 새겨 그의 전승기념비로 만들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렸다. 삼국통일을 도왔던 당나라 주력 군대가 돌아가자 백제 유민들이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 장수 귀실복신(鬼室福信·?~663)은 백제 30대 무왕의 조카인데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로 도처에서 군사를 일으켜 나당연합군을 괴롭혔다. 그 사이 일본에 피신해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장(豊璋)을 옹립해서 백제를 부활시키려 했는데, 돌아온 풍장이 그만 귀실복신을 죽여 버렸다. 공(功)이 임금을 앞서는 자는 죽기 마련이란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지경에서 백제 유민들이 대거 일본 혼슈(本州)의 중부에 자리한 비와(琵琶)호수를 둘러싼 지금의 시가현 일대로도 몰려들었다. 665년엔 남녀 400인이, 668년엔 700인이 건너왔다. 거기 오미(近江) 땅을 개척하고 ‘석탑사’ 절도 세웠다. 부근에 복신의 아들이거나 조카로 추정되는 귀실집사(鬼室集斯)의 묘가 있다. 백제 씨족들이 ‘귀실왕’이라 불렀던 이다. 후지모토 다쿠미가 찍어 소개한 일본의 석탑사 석탑은 7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니 백제 유민이 그곳에 정착한 바로 그 직후였다. 반면, 부여 장하리 탑(보물 제184호)은 고려시대(918~1392) 조성이라 한다. 이 탑에 대한 우리 쪽 설명인즉 “얇고 평박한 지붕돌과 2단으로 된 지붕 받침돌, 1층 탑신의 네 모서리 기둥을 따로 만들고 내부에 판석을 넣어 결구시킨 방식은 정림사지석탑과 같다”는 것. 그렇다면 통일신라를 지나 고려왕조 치세까지 300~400년이 족히 흘렀음에도 백제의 석탑 조성 코드, 거기에 담긴 옛 백제의 문화 정체성이 끈질기게 이어졌다는 말이었다. 이어진 세월이 어찌 그뿐이겠는가. 우리 돌 조각판에서 지금도 일급 석공은 대부분 전남 등지 서해안 출신이다. 백제쪽 출신이란 말이다.
‘정림사지(定林寺址) 석탑’이었다.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나제(羅濟)싸움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지상건축물은 오직 하나. 제1층 석면에 ‘내가 백제를 멸했다’란 말을 새겨 그의 전승기념비로 만들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렸다. 파괴의 회오리 속에서도 당나라 소정방(蘇定方·592~667)이 그 탑 하나만 남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이 연설에 대하여 박헌영은 12월 23일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장문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박헌영은 먼저 이승만이 귀국한 뒤에 “놀랄 만한 열의로서” ‘대동단결’이라는 미명 아래 일관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옹호함으로써 그들의 ‘구주’가 되는 동시에 그들의 최고수령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이승만의 오류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세계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막대한 재산과 인명을 희생한 연합국에 대하여 감사하기는커녕 38도선문제, 연합군의 조선민족에 대한 적국 대우 등등의 이유를 들어 공연한 적의를 표명했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이승만이 “농촌에서 농민은 농사를 아니한다. 노동자는 공장에서 일을 아니한다.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를 이렇게 쓰면 그는 자유를 악용하는 무리이다”라면서, 조선의 모든 혼란의 책임을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에게 돌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부르짖는 구호라고 박헌영은 주장했다. 셋째는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는 경제문제나 관계하고 정치문제는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박헌영은 민주주의 건설단계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정치분야에서 물러가라는 요구는 ‘파쇼’정권을 수립하여 민중을 압박하며 민중을 착취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헌영은 “‘박사’는 아직도 1920년대에 조선을 미국의 위임통치하에 두려고 열렬히 활동하던 그 사상과 계획을 포기하지 아니하였는가”고 묻고, “‘박사’는 조선의 민주주의 건설만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까지 반대하는 자라고 우리는 선언하기를 주저않는다”고 매도했다. 그러면서 해외생활 40년 동안에도 수없는 독립운동자금을 횡령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감행하고, 귀국해서 조선호텔에 묵으면서 보이에게 한꺼번에 만원을 팁으로 주는가 하면 돈암장에서는 수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봉건무자(封建武者)의 생활에도 비견될 수 있는 호화 사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온갖 있는 말 없는 말로 이승만을 비방했다.
이승만의 이 연설에 대하여 박헌영은 12월 23일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장문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박헌영은 먼저 이승만이 귀국한 뒤에 “놀랄 만한 열의로서” ‘대동단결’이라는 미명 아래 일관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옹호함으로써 그들의 ‘구주’가 되는 동시에 그들의 최고수령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이승만의 오류 세 가지를 들었다.
오래전 젊은 날의 옛일이 떠올라 답글을 올립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병역의무를 필하려고 해병대 초급장교로 지원 입대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였습니다. 전투부대 소총소대장으로 수개월째 소대원들을 이끌고 생사의 고비를 넘던 중, 월남전 중 가장 치열했던 68년도 구정 공세날 새벽녘~ 위험에 처한 청룡부대 제10중대를 구출하라는 임무를 받고 며칠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중대장을 잃어 가며)임무를 완수하고 귀환 도중….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면서, 기둥에 목줄이 매여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은 빈사상태의 개 한 마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전령 ‘유재호’ 상병에게 개줄을 풀어 데려갈 것을 명하니, 마침 옆에 있던 선임하사 ‘천철수’ 중사가 말리길 “소대장님예… 살지도 몬할낀데 모할라꼬 쌩고생할랍니껴?” 제가 답하기를 “살릴 때까지다! …데려가자!” 귀하게 아끼던 수통물을 그놈 입가에 대고 벌컥대며 먹이고, 씨레이션, 전투식량을 까 먹이며 귀대하였습니다. 하루하루 원기를 회복한 ‘꽁까이’(소대원들이 붙여준 개이름)는 어느덧 튼실하게 잘 자라 주었고, 우리 수색중대의 ‘마스코트’로 성장하여 주인을 알아보듯 고마운 표정으로 항상 제 곁을 맴돌며 자나 깨나 저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있던 약혼녀의 편지에 ‘꽁까이에게 너무 마음 뺏기지 말라’는 경고도 수차례 받곤 하였답니다. 그런 ‘꽁까이’와의 밀월도 몇 달~. 이제 소대장 임기도 거의 끝날 무렵인 어느 날…. 치열한 공격명령이 하달된 전투에서 마지막 고지탈환의 돌격선에, 철벽 같은 ‘베트콩’의 철조망과 지뢰밭에 봉착, 전소대원이 소낙비 적탄 속의 몰살 위기에…. 저 지뢰밭 속에 단 한 발만이라도 폭파되면, 그 길로 돌격돌파가 가능할 텐데…. 오직 그 생각뿐인 소대장의 간절한 소망…. 그렇다고 부하를 그 속에 뛰어들게 할 수도 없는 소대장의 아픈 마음…. 결국 이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소대장이 뛰어들어 부하들을 살릴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 적탄은 빗발치고…. 여기저기 소대원의 비명소리…. 약혼녀와 부모님의 얼굴도 잠시…. “얍 !!!…. 부하들의 목숨을 위해…. 이 한몸을…!”
전투부대 소총소대장으로 수개월째 소대원들을 이끌고 생사의 고비를 넘던 중, 월남전 중 가장 치열했던 68년도 구정 공세날 새벽녘~ 위험에 처한 청룡부대 제10중대를 구출하라는 임무를 받고 며칠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중대장을 잃어 가며)임무를 완수하고 귀환 도중….
2011년 1월 14일,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은 벤 알리 독재 정권을 퇴진시키고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튀니지 혁명은 튀니지의 국화(國花)인 재스민의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재스민 혁명이 일어난 지 7년의 시간이 흘렀다. 혁명 이후 튀니지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혁명 전후 언론 환경의 변화, 재스민 혁명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튀니지 현지를 방문했다. 지난 4월 19일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 위치한 카르타고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이름에 과거 로마와 지중해 패권(覇權)을 두고 다툰 ‘카르타고’가 들어가 있어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내 지방 공항과 규모가 비슷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튀니스의 중심지인 하비브 부르기바 광장으로 향했다. 튀니지의 택시는 폴크스바겐, 르노, 시트로앵, 푸조 등의 유럽산 경차로 모두 노란색이었다. 밖에서 봤을 때 내부가 매우 깔끔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타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내부는 폐차(廢車) 수준이었다. 유럽에서 폐기되기 직전의 차량을 수입해 택시로 쓰기 때문이었다. 차창 밖의 튀니지 모습은 여느 이슬람 국가들보다 자유로웠다. 건국 당시부터 세속주의를 표방했고, 여성의 권리를 높게 인정했기에 튀니지 여성 상당수는 이슬람 전통 의상을 착용하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했다. 우리의 ‘광화문광장’과 같은 튀니스 중심부 하비브 부르기바 광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건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의 동상이었다.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은 1957년부터 1987년까지 30년간 독재 통치를 했음에도 프랑스 식민 통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튀니지를 건국했다는 점에서 튀니지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었다. 동상 앞에서 만난 튀니지 교육부의 하센 벤 슬리만 국장은 부르기바 대통령의 동상을 가리키며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인 부르기바는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자로서 존경받는 지도자 중의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부르기바는 1987년 당시 총리였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대통령직을 사실상 빼앗기듯 넘겨준다. 이후 2011년 재스민 혁명 전까지 23년간 벤 알리의 독재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
튀니지 혁명은 튀니지의 국화(國花)인 재스민의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 1월 14일,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은 벤 알리 독재 정권을 퇴진시키고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은 1957년부터 1987년까지 30년간 독재 통치를 했음에도 프랑스 식민 통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튀니지를 건국했다는 점에서 튀니지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었다.
‘엿이요, 엿 조선 엿.’ 특유의 악센트로 아이들에게 외쳐 대면서, 엿을 자르는 망치를 땅땅거리고 울려 대었다. 엿이 맛있는지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앞의 영감님처럼 놀림 받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아이들에 웃어 마치는 그 미소는 무척이나 쓸쓸한 것이었다. 통학하는 길에 때때로 눈에 뜨이는 조선사람 토목 인부들도 나는 떠올렸다. 그 어두운 인상을 나는 뜨내기 떠돌이의 적적함과 괴로움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었지만서도, 생각건대 그것은, 그들을 그 같은 신세 지경으로 몰아넣은 일본사람에 대해 억누르고 억누른 분노가, 그늘에 들어찬, 슬피 안으로 안으로 곱쳐 든 어둠이었는지도 모른다. … ‘…?’ 유달리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왔다…?’ 귀를 기울였더니, 그것은 오토바이의 그 탕탕탕 … 하는 소리였다. 한 대뿐의 소리로서, 그 소리 이외의 소리가 없는 것은 이상했지만, 척후였을까고도 생각되었다. 불안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은 이윽고 앞쪽의 전차거리를 전속력으로 지나가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심야와도 같은 정적이 왔다. 데마로 판명난 것은 얼마나 지나고 나서였을까,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판명이라고 해봤자 그건 ‘메구로 방면으로부터의 대거 내습’이 데마였다는 것일 뿐, ‘조센진’ 폭동설이라는 것이 애당초 뿌리도 이파리도 없는 허무맹랑한 데마로 판명된 것은 아니었다. 이 조센진 폭동이란 데마는 도대체 누가 말을 끄집어낸 것일까, 어떤 곳에서부터 발생한 것인가, 어느 것도 확실한 증거는 없이 의문인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 같은 데마가 당시 확실하게 사실로서 믿어지고 순식간에 사실로서 유포된 것은, …진재(震災)로 인심이 산란해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면 그건 끌어다 붙인 이유라는 느낌을 면할 수 없고, 근본은 조선에 대해 일본인 전체가 느끼고 있는 일종의 죄악감,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 언젠가는 조선인한테 복수 당하는 것 아닐까라는 공포, 그것이 그 같은 데마를 낳게 한 밑바탕이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기다가 이 공포가 낳은 조센진 내습 데마에, 이번엔 또 스스로가 불끈하고 터져올라, 결국은 조선인 학살이라는 눈 뒤집힌 (광란의) 행동으로 나왔다.
이 조센진 폭동이란 데마는 도대체 누가 말을 끄집어낸 것일까, 어떤 곳에서부터 발생한 것인가, 어느 것도 확실한 증거는 없이 의문인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재(震災)로 인심이 산란해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면 그건 끌어다 붙인 이유라는 느낌을 면할 수 없고, 근본은 조선에 대해 일본인 전체가 느끼고 있는 일종의 죄악감,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아니 어쩌면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국내외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 의구심(疑懼心)이 있어 왔던 것 같다. 내연(內燃)하던 그 의구심이 표출된 사건이 2001년 한러정상회담과 ABM(Antiballistic Missile・탄도탄요격미사일) 파문이었다. 2001년 2월 27일 김대중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런데 공동성명에 “ABM 조약이 보존되고 강화돼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이 추진 중인 국가미사일방어체계(NMD・National Missile Defense)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고 있었다. 러시아는 NMD가 1972년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ABM조약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한-러시아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미국 《뉴욕타임스》지(誌)는 다음날 ‘한국이 러시아 편을 들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난리가 났다. 엄밀히 말하면 《뉴욕타임스》지의 이 보도는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ABM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Preserve and strengthen)”라는 문구는 “NMD에 반대한다”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표현은 ABM 및 NMD와 관련해 미국과 러시아가 이미 합의한 내용이었다. 미국은 NMD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ABM조약을 개정(Amend)하려 했지만, 러시아(구소련 포함)가 완강하게 반대하자, ‘strengthen’이라는 표현을 내놓았다. 상황에 따라서 조약을 개정한다는 암시(Implication)를 가지고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 “ABM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는 표현이 NMD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미국이 그런 표현을 제안하고 거기에 합의했을 리 없다. 이 합의가 나온 후인 1993년 미 의회에서는 NMD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1995년 유엔 NPT(핵확산금지조약)평가회의에서는 150개국이 이 문안에 대해 지지했다. 2000년 7월의 오키나와 G8(러시아 포함)에서도 이 표현을 그대로 원용(援用)했다. 그 후 러시아·캐나다, 러시아·일본 공동성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1년 2월 27일 김대중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런데 공동성명에 “ABM 조약이 보존되고 강화돼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한-러시아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미국 《뉴욕타임스》지(誌)는 다음날 ‘한국이 러시아 편을 들었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된 공화당 사전조직이다. 후일 야당 등에서는 “군사정부가 야당 정치인들은 정치규제로 묶어놓고 자기들은 비밀리에 공화당 조직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오히려 당시 상황에서 정치활동이 재개될 경우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은 옛 야당 세력이었다. 그들은 정치활동이 재개되기만 하면 언제든지 옛날 인맥과 조직을 다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5·16 세력은 당장 권력을 잡고 있기는 했지만, 민정 이양 시 가동할 수 있는 정치적 인프라는 없었다. 때문에 혁명 주체세력 입장에서는 민정 이양 후 정치를 계속하려는 이상 정당 사전조직은 불가피했다. 공화당은 기존 정당들과는 달리 ‘사무국 중심의 정당’을 지향했다. 이는 김종필(金鐘泌) 중앙정보부장의 발상이었다. 그는 기존 정당들이 ‘국회의원 중심 정당’으로 운영되다 보니, 각종 이권(利權)이나 청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 바람에 정치가 왜곡됐다고 생각했다. ‘사무국 중심의 정당’이 되면, 특정 정치인의 사당(私黨)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공당(公黨)으로 지속적으로 존재하면서, 조국 근대화라는 이념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사무국 조직요원 인선 기준은 상당히 엄격했다. ① 전에 정치를 하지 않은 사람일 것 ②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일 것 ③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하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일 것 ④ 일정한 재력(財力)을 가진 사람일 것 등이었다. 국회의원 지역구마다 사무국장을 비롯해 세 명의 필수요원을 확보해야 했는데, 당시 이런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대학교수, 초·중·고교 교장, 시·도 국장급 간부 등밖에 없었다. 이미 안정된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국회의원도 아니고 사무처 요원으로 일해 달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정 이양 후 새로운 집권여당의 사무처 요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만 있어도 좋았겠는데,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냥 에둘러서 “나라를 위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해보자”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래도 용기 있게 동참해 주신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그는 기존 정당들이 ‘국회의원 중심 정당’으로 운영되다 보니, 각종 이권(利權)이나 청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 바람에 정치가 왜곡됐다고 생각했다. ‘사무국 중심의 정당’이 되면, 특정 정치인의 사당(私黨)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공당(公黨)으로 지속적으로 존재하면서, 조국 근대화라는 이념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는 김종필(金鐘泌) 중앙정보부장의 발상이었다.
확실한 것은 황후가 라스푸틴에게 사로잡힌 이유가 성적 이유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시작은 전혀 다른 일로 라스푸틴에게 빠져들었다. 왕권 강화, 즉, 알렉세이 황태자 때문이었다. 황제와 황후 사이에는 자식이 내리 딸만 넷이었다. 왕권을 위해서는 아들이 절실했다. 그러다 얻은 아들이 바로 어린 알렉세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귀한 아들이 혈우병자라는 거였다. 혈우병(hemophilia)은 피를 응고시키는 인자가 부족해서 피가 멈추지 않는 유전성 질병이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듯이, 혈우병은 X염색체 열성으로 자손에게 유전된다. 그래서 여성[XX]의 경우, 한쪽 X염색체에 혈우병 인자가 있어도 열성이어서 병이 발현되지 않지만, 남성[XY]의 경우는 별다른 의미 없는 Y염색체로 인해 X염색체의 혈우병 인자가 발현되어 병이 나타난다. 특별한 다른 케이스도 있지만, 아무튼 간단히 말해 혈우병은 여성은 걸리지 않고 남성만 걸리는 유전질환이고, 그 원인은 어머니 쪽 X염색체의 혈우병 인자를 물려받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혈우병 인자는 그 유명하고 위대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Victoria, 1819~1901)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다. 황후의 고민과 괴로움은 자신으로 인해 귀하디귀한 아들, 로마노프 왕조의 유일한 계승자인 알렉세이, 이 혼란스런 러시아 정국을 안정시킬 황태자가 병이 들어 피만 흘리면 큰일 나는 아이로 태어났다는 거였다. 그녀의 번민과 낙심, 절망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소한 상처가 나라를 뒤흔들 엄청난 죽음까지 몰고 오는 저주받을 질병이 바로 자신에게서 이어졌으니 말이다.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있으니 그 감정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요승(妖僧) 라스푸틴이다. 그가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는 모르나 알렉세이의 혈우병이 멈춘 것처럼 재주를 부렸고, 그로 인해 황후는 그를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이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흘러갔다.
황후의 고민과 괴로움은 자신으로 인해 귀하디귀한 아들, 로마노프 왕조의 유일한 계승자인 알렉세이, 이 혼란스런 러시아 정국을 안정시킬 황태자가 병이 들어 피만 흘리면 큰일 나는 아이로 태어났다는 거였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요승(妖僧) 라스푸틴이다. 그가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는 모르나 알렉세이의 혈우병이 멈춘 것처럼 재주를 부렸고, 그로 인해 황후는 그를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이씨는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우크라이나에서 웹툰 하나가 올라왔는데 조회 수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5126만명)보다 더 많았습니다. 이 만화가 뭘까. 연구 좀 해 보자고 해서 알아봤더니 네이버 웹툰이었어요. 그 나라 사는 사람이 자기네 말로 번역해서 불법으로 올린 것이었지요. 이런 적도 있었어요. 제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초대받아 갔는데 그곳에 미국 팬들이 왔더라고요. 이런 사례들만 봐도 우리나라 웹툰이 해외에서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 세계 곳곳에서 한국 ‘웹툰’이 읽히고 있다. 웹툰은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콘텐츠 공유 사이트를 통해 확산된다. 특히 ‘망가폭스(mangafox)’를 비롯한 만화공유 사이트가 한국 웹툰을 세계로 확산시킨 주요 루트다. 이 사이트에는 세계 각국의 만화 1만여 종을 영어로 번역해 올린다. 저작권이 지켜지지 않는 불법 사이트지만 세계 만화의 추세와 인기를 알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간 망가폭스 인기순위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같은 망가(manga·일본 만화)가 휩쓸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신의 탑’ ‘노블레스’ ‘갓 오브 하이스쿨’ 등 한국 웹툰이 순위권에 들기 시작해 1~10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늘었다. —국내 웹툰이 해외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콘텐츠가 새롭고 창의적이기 때문 아닐까요. 기술도 훨씬 앞서고요. 제가 대만에서 열린 국제만화가대회에 초청을 받아 한국 웹툰의 제작 방식을 설명하고 왔는데 제 이야기를 듣던 다른 나라 작가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웹툰 작가들은 배경을 3D로 만듭니다. 건축 쪽에서 쓰는 프로그램을 웹툰에 응용한 것이지요. 이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 작가들이 제일 잘합니다. 이런 이야기만 해 줘도 다른 나라 작가들은 매우 신기해하지요. 다른 나라 작가가 발표하는 것을 들어보면 우리가 10년 전에 하던 것들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디지털 테크닉 같은 기술적인 측면은 외국보다 우리가 압도적으로 앞서 있습니다.”
실제 세계 곳곳에서 한국 ‘웹툰’이 읽히고 있다. 웹툰은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콘텐츠 공유 사이트를 통해 확산된다. 특히 ‘망가폭스(mangafox)’를 비롯한 만화공유 사이트가 한국 웹툰을 세계로 확산시킨 주요 루트다. 저작권이 지켜지지 않는 불법 사이트지만 세계 만화의 추세와 인기를 알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여기까지 들은 재판장은 얼른 변호사를 불렀다. “어떻습니까? 그런 것을 지금 여기서 말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미즈노 변호사가 대답했다. “어차피 내일 진술시킬 것이라면 시간도 있으니 지금 진술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안중근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토를 살해한 것은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었습니다. 일로전쟁 개전 당시 일본 천황폐하의 宣戰詔勅(선전조칙)에 의하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선언이 있었습니다.” 첫날 심리 때 거사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폈던 논리 그대로였다. 일본의 천황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이토가 이를 어기고 강제로 한국 황제를 폐하고 5개조, 7개조의 보호조약을 체결케 하였으므로 이토를 제거하여 동양 평화의 기틀을 마련코자 거사했으며, 이는 또 독립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수행한 전쟁의 일환이므로 당연히 전쟁포로로 취급되어야지 사사로운 살인죄로 재판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토 공을 살해한 것은 한국 독립전쟁 중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한 것입니다. 하므로 오늘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도 전쟁에 나가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객으로서 심문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의견을 진술코자 하는 것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말씀 드린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이토 공작이 한국에 온 이상 한국 황제폐하의 외신으로 처신하여야 할 것인데도 무엄하게도 황제폐하를 억류하고 廢帝(폐제)하는 범죄를 저질렀으니 이에 한국 국민은 상하 막론하고 의병을 일으켜 싸우고 있으며 일본은 군대를 보내어 이를 진압하고 있으니 일본과 한국은 전쟁 중이라 하겠습니다. 셋째, 이 모든 상황은 이토가 저지른 것이니 이토는 일본 측에서 보나 한국 측에서 보나 역적입니다. 넷째, 지난 갑오년에 한국에는 커다란 불행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이토 통감이 한국 황후를 일본의 병력을 이끌고 살해한 국난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이토는 일본에서도 역적이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안중근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일본의 천황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이토가 이를 어기고 강제로 한국 황제를 폐하고 5개조, 7개조의 보호조약을 체결케 하였으므로 이토를 제거하여 동양 평화의 기틀을 마련코자 거사했으며, 이는 또 독립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수행한 전쟁의 일환이므로 당연히 전쟁포로로 취급되어야지 사사로운 살인죄로 재판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배를 빌려 항해를 마치고 나서 탕가로 돌아왔다. 빈민촌 아이들에게 가기 위함이다. 본인의 봉사일도 바쁜데 남는 시간에 불우한 아이들을 돕는 코이카 단원이 있어 함께 아이들과 산책을 나갔다. 단순히 후원하고, 놀아 주는 차원을 넘어 실질적으로 아이들 편에서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는 열정 어린 모습에 자극이 된다. 아이들은 책을 좋아한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도서관 출입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빈민가 아이들이 도서관 문턱을 넘기에는 절차가 간단치 않다. 이 문제를 김현임 단원이 해결해 주고 있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공부한 것을 토대로 사회가 정해 놓은 매뉴얼에 따라 진로를 결정하기보다 더 건강한 자연속의 삶을 꿈꾸며 스스로 뜻한 바가 있어 아프리카 봉사 현장에 뛰어든 그녀는 본인의 일과 시간 외에도 휴일에 스스로 어려운 아이들을 찾아 도서관 출입부터 가정 방문, 학습 도우미까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첫 도서관 출입증이 나온 날, 아이들은 가장 먼저 만화로 그려진 책들에 흠뻑 매료되었다. 학습만화에도 그저 신기한 채 새하얀 덧니를 드러내며 싱글벙글이다. 밖에서는 늘 장난만 치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뚫어지게 책을 들여다보며 집중하는 모습이 여간 대견하지 않다. 우리는 아이들의 집을 방문한 이후 도서관, 해변을 데리고 다니면서 놀아 주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늦은 오후가 되어 다시 집으로 가는 길에는 과일을 잔뜩 사서 택시 편으로 아이들을 보내 주었다. 다섯 가정이 한 집에서 살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이들이다. 표정을 보니 잠시나마 외출을 통해 남루한 현실을 잊은 듯 보인다. 조그만 마음이라도 진심이 전달되었다면 감사한 일이다. 김현임 단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아름답게 섬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통고니 해변 등에서처럼 공정여행을 접목해 의미를 찾는 여행을 하는 것이 꿈이다. 나는 그녀에게 친절과 배려에 대해 배운다. 그 효과는 아이들의 미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찰 여행 중인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이곳 아이들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김현임 단원이 해결해 주고 있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공부한 것을 토대로 사회가 정해 놓은 매뉴얼에 따라 진로를 결정하기보다 더 건강한 자연속의 삶을 꿈꾸며 스스로 뜻한 바가 있어 아프리카 봉사 현장에 뛰어든 그녀는 본인의 일과 시간 외에도 휴일에 스스로 어려운 아이들을 찾아 도서관 출입부터 가정 방문, 학습 도우미까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물러나온 전경환은 보안사로 전화를 걸었다. 저녁 8시 경 전두환 사령관은 차량으로 이동 중에 무전으로 “사령부로 전화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부관이 인근 가게에 가서 사령부로 전화를 걸었더니 “청와대 전경환씨가 사령관님을 찾아서 급히 전화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했다. 전경환에게 전화를 했지만 얼른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사령관 비서실에서도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빨리 육군본부로 나오라고 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전 사령관은 부관을 시켜 경호실장, 경호실 상황실장 정동호 준장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지금 바쁘다”는 상황실 관계자로부터 “안의 일이다”라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전 사령관은 9시쯤 육군본부 벙커에 나타났다. 보안사는 국군서울지구병원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무엇인가 변고가 발생했고 서울지구병원에 김계원 실장이 VIP로 보이는 인사의 시신을 모셨다는 소식을 접한 보안사에서는 우국일 참모장, 당직사령, 그리고 전두환 사령관이 잇달아 서울지구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병수 병원장은 침대 위에 뉘여 있는 시신을 보기는 했지만 그게 박 대통령의 시신이라는 것은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 사령관이 물었다. “누구냐? 각하야?” “아닙니다.” “실장인가?” “아닙니다. 아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병수 원장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김 실장은 “정중히 모시라”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김 원장이 시신을 국군수도통합병원 영안실로 모시자고 했으나 김 실장은 “청와대 의무실로 모시라”고 했다. 대통령이 쓰는 청와대 의무실로 시신을 옮기라는 말에 김 원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VIP’가 모셔져 있는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는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경비원 유성옥·서영준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권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시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했다. 김 원장은 “흉부의 상처 처리 상황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했다. 중정 경비원들은 와이셔츠를 걷어 시신의 얼굴을 가렸다. 와이셔츠를 걷어 올리자 아랫배에 희끗희끗한 반점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김 원장은 그 시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몇 해 전 박정희 대통령은 저도 별장에서 그 반점을 보여주면서, “김 박사, 이것 좀 치료 안 해 줄래?”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었다.
전 사령관은 9시쯤 육군본부 벙커에 나타났다. 보안사는 국군서울지구병원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무엇인가 변고가 발생했고 서울지구병원에 김계원 실장이 VIP로 보이는 인사의 시신을 모셨다는 소식을 접한 보안사에서는 우국일 참모장, 당직사령, 그리고 전두환 사령관이 잇달아 서울지구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선포와 조각발표에 대하여 북한의 소련군사령부는 아무런 반응 없이 사실확인에 주력했다. 소련인들이 인민공화국 결성과정을 인식한 경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얻는 정보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주재 소련 총영사관의 보고였다.41) 9월에 한국의 공산주의운동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평양에 파견된 연해주군관구 정치부 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인민공화국과 박헌영의 관계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조사위원의 한 사람인 메클레르(Gregory K. Mekler) 중령은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을 주도하고 있는 점과 관련하여 박헌영과 서울 중앙의 실제활동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건의했다. 메클레르는 인민공화국이 여운형과 박헌영의 합작으로 조직되었고, 그것은 미군정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메클레르는 이 정부에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한 친미주구 이승만이 주석에, 아베 총독의 천거에 따라 친일주구 여운형이 중앙인민위원〔부주석〕에, 변호사 허헌이 부주석〔국무총리〕에, 중경에서 망명생활을 한 악명 높은 우익 민족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인 김구가 내무부장에, 평양의 친일주구 조만식이 재정부장에 임명되었는 데 비해 공산당은 보안, 교육〔교통〕, 경제, 노동의 4개 부장직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면서 우익적이고 친미적인 조각구성을 비판했다. 서울 주재 총영사관의 부영사 샤브신(Anatolii I. Shabshin)도 9월 22일에 인민공화국에 대한 비슷한 정보보고를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Terentii F. Shtykov)에게 보냈다.42) 또한 총영사 폴리안스키(Alexander S. Poliansky)는 10월초에 “조선의 상황에 대한 간략한 보고”에서 인민공화국의 각료들을 소개한 다음 “각료 모두가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 구성된 내각은 실제로 업무를 개시하지 않았다. 아무도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정부 구성을 지지하였고 고위직을 차지하지 않은 데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라고 짧게 언급했다. 그러나 그 말의 뉘앙스는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소련군당국은 인민공화국에 대해 10월 초까지 확실한 입장을 결정하지 않았다.43)
9월에 한국의 공산주의운동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평양에 파견된 연해주군관구 정치부 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인민공화국과 박헌영의 관계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조사위원의 한 사람인 메클레르(Gregory K. Mekler) 중령은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을 주도하고 있는 점과 관련하여 박헌영과 서울 중앙의 실제활동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건의했다.
—그룹 규모에 비해서 본사 사옥은 지나칠 정도로 검소한 것 같습니다. “생산직원들이 근무하는 공장은 모두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별 필요도 없이 커다란 사옥이나 짓는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동산개발도 나름 수익성이 높은 사업일 텐데요. “부동산개발 사업에는 여러 특혜가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건 내 철학과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의 당당함의 배경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래도 기업은 사람일 텐데, 사람 경영은 어떻게 하나요. “내가 휴일이 없으니 직원들도 고달픈 면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인정과 의리를 중시합니다. 우리 직원들 모두가 집과 자동차,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니 각각이 직원이고 사장인 셈입니다. 덩샤오핑 선생께서도 일부 사람이 먼저 부자가 된 뒤 다른 사람들을 끌어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선부론(先富論)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중국 인민 모두가 잘 먹고 잘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또 회사의 지속과 성장을 위해서 수시로 젊은 피를 수혈합니다.” —요즘 중국 상황을 보면 기업은 물론 정부에까지 지나치게 젊은 층 우선의 경향을 보이는데 경륜의 지혜도 필요한 게 아닐까요. “발전 중인 국가에서는 선진적인 지식과 마인드가 필요하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두고 사람들은 쉽게 전형적인 중국 부자라고 평가한다. 외양에는 아무런 관심 없이 그저 부만 축적하는 전형 말이다. 그러나 쭝칭허우를 돈만 그러모으는 부자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기업경영에 대한 뚜렷한 철학과 지향하는 가치, 탈법이나 특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기껏 소비재로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으로 폄훼하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식음료 사업은 순간적인 아이디어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데 그칠 수 없는, 지속되어야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조업이다. 그의 제품이 그저 반짝 아이디어였거나 문제가 있었다면 결코 그처럼 지속적인 성장으로 최고의 부를 일궈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뚝심과 의지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넓은 대륙을 아우르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철옹성의 유통망을 구축했다. 그는 이제 백화점, 복합쇼핑몰 등으로 더욱 큰 유통 제국을 건설할 계획이다. 세계적 유명 상품을 자신의 유통망을 통해 전국에 공급하는 신규 사업도 시작했다. 8월 말, 2박3일 일정으로 한국 방문 계획을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를 두고 사람들은 쉽게 전형적인 중국 부자라고 평가한다. 무엇보다 기업경영에 대한 뚜렷한 철학과 지향하는 가치, 탈법이나 특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쭝칭허우를 돈만 그러모으는 부자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기껏 소비재로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으로 폄훼하는 시선도 있다.
화분에 심은 꽃을 나쁜 마음으로 ‘죽어라, 죽어라’ 하면 정말 말라 죽고, 귀엽다고 쓰다듬어 주면 빛깔도 좋은 잎에다가 꽃도 아름답게 피우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마음 하나로 없던 병을 앓아서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고 앓던 병도 낫게 하거나, 아예 병을 앓지 않게 해서 오래 살 수 있게도 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황제내경》에서 ‘백세를 넘기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려거든 마음을 거두어들여서 고요히 하라’ 하였던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탁한 에너지는 저절로 사라지고 미생물들이 ‘얼씨구나!’ 하고 춤을 추며 좋은 에너지를 생성할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한 천지의 에너지도 몸속으로 모여들기 마련이라 당연하다. 그나저나 그놈의 마음을 원하는 대로 낼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된다. 늘 좋은 마음이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오장육부가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오장육부가 마음을 일으키는 곳간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반드시 오장육부의 크고 작음 내지 강하고 약함에 따라 일어나게 되어 있다. 가령 간이 다른 장부에 비해 작고 약하면 신경질이 많아지고 병들면 더 심해진다. 반대로 크고 강하면 성질이 불같고 스트레스도 잘 받으며 미움과 증오와 같은 분노도 심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체질을 잘 진단해서 음식과 약초로 약한 장부는 실하고 강하게 에너지를 더해 주고 강한 장부는 에너지를 덜어 주고 억제해 주면 마음이 치우침 없이 평등해지기 마련이다.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간은 심장을 돕고, 심장은 비장을, 비장은 폐를, 폐는 신장을, 신장은 간을 돕는다. 반면에 간은 비장을 억압하고, 비장은 신장을, 신장은 심장을, 심장은 폐를, 폐는 간을 억압한다. 그리고 간은 신맛, 신장은 짠맛, 폐는 매운맛, 비장은 단맛, 심장은 쓴맛을 즐기고 생존하는 미생물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그에 맞는 음식으로 돕거나 더하고 억제해 주면 오장이 평등해지고 오장이 평등하므로 마음도 평등해지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오장육부가 마음을 일으키는 곳간이라 하였다. 따라서 체질을 잘 진단해서 음식과 약초로 약한 장부는 실하고 강하게 에너지를 더해 주고 강한 장부는 에너지를 덜어 주고 억제해 주면 마음이 치우침 없이 평등해지기 마련이다. 가령 간이 다른 장부에 비해 작고 약하면 신경질이 많아지고 병들면 더 심해진다.
미국인 ‘제임스 알 모스(James R. Morse-편집자)’가 구(舊) 한국정부에 대하여 반도 전부 간선철도를 청부(請負)하려고 미국공사를 통하여 교섭하였으나 한국정부와 일본과의 잠정조관 체결이 성립되어 모스는 부득이 이 교섭을 중지하고 전후 사세(事勢)만 엿보고 있던 중 철도부설권 확정에 관한 교섭이 지연되고 더욱 한(韓)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한 태도가 좋지 못함을 간파하고 다시 특허운동을 한 결과, 구 한국정부는 서기 1896년(명치 29년) 3월 29일부로 경인간 철도부설의 특허를 모스에게 주었다. 이 계약은 본(本)철도 기공기를 특허한 일자로부터 12개월 이내로 하고, 기공 후 3년간 준공하기로 하여, 만약 여기 위반할 시는 모든 계약은 무효라고 규정하였으므로 모스는 곧 회사를 조직하고 측량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이와 같이 모든 교섭이 실패에 돌아가고 미국인 모스에게 철도부설권이 가게됨에 불만불평을 가지었으나 어이할 수 없었다. 모스는 측량한 결과 전선(全線)연장이 26리여(哩餘)이요, 선로는 약 1개년, 한강교량은 2개년을 요(要)할 예산으로 인천~경성 간 공사 기공식을 서기 1897년 3월 22일에 거행하고 실지(實地)에 착수하였다. 연(然)이나 모스는 자금조달에 곤란이 생하였다. 미국 자본가들은 너무도 원격(遠隔)한 곳에 투자하기를 싫어하여 모스는 점점 곤란한 입장에 입(立)하여 부득이 부설권 양도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당시 경부철도부설위원 섭택영일(澁澤榮一·시부사와 에이이치-편집자) 등은 외무대신 대외중신의 찬성을 얻어 경인철도를 양수(讓受)하기를 결정하고 교섭을 진행하여 경인철도 인수조합을 조직하고 서기 1897년 5월에 횡빈에서 모스와 양수계약을 조인하고 계약금 5만불을 주었다. 그 후 조합에서는 공학박사 선석공을 감독기사장으로 하고, 모든 공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모스는 6월 13일에 돌연히 계약금 증가를 요구하여 만약 불연(不然)이면 계약금 외 상당한 부상금을 지불하고 계약해제를 요구하였다. 조합은 정부와 여러 번 협의한 결과 해(該)철도 외 부속물 등으로 제보(提保)도 하고 횡빈정금(正金)은행으로 100만원 해관(偕款)계약을 성립시키고 계약금 증가 요구를 철회시켰다.
모스는 측량한 결과 전선(全線)연장이 26리여(哩餘)이요, 선로는 약 1개년, 한강교량은 2개년을 요(要)할 예산으로 인천~경성 간 공사 기공식을 서기 1897년 3월 22일에 거행하고 실지(實地)에 착수하였다. 연(然)이나 모스는 자금조달에 곤란이 생하였다. 미국 자본가들은 너무도 원격(遠隔)한 곳에 투자하기를 싫어하여 모스는 점점 곤란한 입장에 입(立)하여 부득이 부설권 양도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는 국가 차원 또는 여러 비정부기구(NGO) 단체 등에서 동남아 국가들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지원이나 후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라오스에는 아직 제대로 된 지원이 거의 없습니다. 유엔(UN) 경제사회이사회(ECOSOC·Economic and Social Council) 특별협의 지위를 획득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소년을 위한 NGO 단체 중의 하나인 비영리 공익단체 청예단(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서 제3세계 빈곤 아동, 청소년을 위한 ‘행복 도서관 짓기 운동’의 일환으로 라오스에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청예단에서는 라오스에 도서관을 지어 주고 있고, 교육을 통한 빈곤한 아이들의 휴먼스토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대학생과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를 파견하고, 파견 직원을 통해 도서관 운영과 마을 청소년 교육, 청소년 자원봉사자 실습현장 마련, 대학생 봉사활동 실시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예단에서는 도서관 짓기 운동 이외에도 ‘도서기부 캠페인’과 라오스 책 오디오를 만들어서 시각장애인도 책을 들을 수 있는 ‘행복한 오디오북 캠페인’, 그리고 20개 학교의 낡은 칠판을 교체해 주기 위한 ‘YELLOW BOARD(희망의 칠판 캠페인)’를 함께 전개하고 있습니다. 배울 수 있는 나이에 배우지 못하고 잘 먹을 수 있는 나이에 잘 먹지 못하는 것 역시 사회가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범하는 폭력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우리 가족 아니면 우리나라의 아이들만을 생각하고 그들만을 위한 활동을 하기 보다는 우리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게 사는 여러 나라의 아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밥을 먹고 싶어도, 친구와 함께 놀고 싶어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라오스의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은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행복을 만드는 일입니다.
청예단에서는 라오스에 도서관을 지어 주고 있고, 교육을 통한 빈곤한 아이들의 휴먼스토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대학생과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를 파견하고, 파견 직원을 통해 도서관 운영과 마을 청소년 교육, 청소년 자원봉사자 실습현장 마련, 대학생 봉사활동 실시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배울 수 있는 나이에 배우지 못하고 잘 먹을 수 있는 나이에 잘 먹지 못하는 것 역시 사회가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범하는 폭력이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말하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 ‘누나도 가만 두지 않겠다.’ 각목으로 폭행을 일삼던 가해학생들을 만나 보니 그저 겁에 질린 고등학교 2학년생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 사회에서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대장이었지만 어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어린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 순간을 모면하고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는 공허한 소리만이 그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학생을 폭행하고 돈을 뺏고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학교는 진실을 외면했고, 다른 피해자 부모들은 사실을 숨기기 바빴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왜 시끄럽게 만드느냐? 당신 혼자 떠든다고 세상이 바뀌는 줄 아느냐? 우리 아이가 장난으로 한번 때린 것이 무슨 큰 잘못이라고 대현이의 죽음을 우리한테 문제 삼느냐? 학교에서는 어린아이들끼리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왜 큰 문제 있는 학교인 양 난리치고 있느냐?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 자식만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 이기주의 앞에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학교는 그리고 우리의 학부모들은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대현이의 죽음은 천지를 바꿔놓았습니다. 저는 원래 한 회사 중견 경영인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학교폭력을 그냥 좌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학교폭력 문제 전문가처럼 되어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룹사 기조실장으로 엄청나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어려웠지만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의 시간을 이용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한 사업이 ‘학교폭력예방재단’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재단 설립 준비를 마치고 설립허가를 서울시에 냈는데 담당자의 의견이 학교폭력이라는 용어가 들어가는 단체는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겪는 폭력은 학생 중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불량학생에 의한 것이지 학교 자체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학교폭력이라는 이름 대신 청소년폭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허가 신청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에게 말하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 ‘누나도 가만 두지 않겠다.’ 각목으로 폭행을 일삼던 가해학생들을 만나 보니 그저 겁에 질린 고등학교 2학년생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 사회에서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대장이었지만 어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어린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40분/1.6km 초록색 울타리를 동무 삼아 녹음(綠陰)이 짙은 숲길을 걷는다. 얼마간 걸으면 국립현충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보인다. 지금 걷는 현충원 담장길에서 현충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세 개의 개방문 중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개방문은 ‘흑석동 문’이다. 우리는 ‘상도동 문’을 이용할 것이니 담장을 따라 15분 정도 더 울타리 숲길 산책을 즐기자. 그러면 어느새 현충원으로 진입할 ‘상도동 문(3)’ 앞에 다다른다. 문을 넘어 국립현충원 안으로 들어선다. 1956년 대통령령(令)으로 군(軍)묘지령이 제정되어 안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국립현충원. 처음에는 국군묘지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애국지사, 경찰관, 향토예비군 안장이 가능해졌다. 묘역 구간을 제외한 산림지역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덕에 식생(植生)이 매우 안정되어 있다. 상도동 개방문을 통해 현충원 안으로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길은 왼편으로 뻗는다. 안으로 들어왔으니 지금껏 오른쪽에 있던 담장이 왼쪽에 있게 된다. 담장과 멀어지며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저절로 제 모습을 갖춘 현충원 참나무숲길을 걷는다. 곧 왼쪽으로 현충원에 잠든 호국영령들을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사찰 경내로 들어설 수 있다. 국립현충원과 함께 건립된 사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도선(道詵)국사에 의해 갈궁사(葛宮寺)란 이름으로 최초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고려 공민왕 때 보인스님이 세웠다고도 한다. 이후 1577년(선조10년)에 중종임금의 후비인 ‘창빈 안씨’ 묘가 인근에 들어서며 왕실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때는 이 산의 이름도 서달산이나 공작봉이 아닌 화장산이었단다. 그 후 국립현충원이 들어서면서 사찰 이름이 호국지장사로 바뀌었다. 사찰 안에는 600여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철불좌상과 함께 조선 후기 화원스님이 그린 능인보전의 탱화 등 문화재도 여럿 전해진다.
그러면 어느새 현충원으로 진입할 ‘상도동 문(3)’ 앞에 다다른다. 문을 넘어 국립현충원 안으로 들어선다. 담장과 멀어지며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저절로 제 모습을 갖춘 현충원 참나무숲길을 걷는다. 곧 왼쪽으로 현충원에 잠든 호국영령들을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사찰 경내로 들어설 수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열전에서 시대도 다르고 나라도 다른 초(楚)나라의 굴원(屈原, 기원전 343~278년)과 한나라 문제(文帝) 때의 가의(賈誼, 기원전 200~168년)를 나란히 ‘굴원 가생(賈生-가의) 열전’에 싣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윗사람의 지우(知遇)를 받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굴원은 초나라 회왕(懷王) 때 좌도(左徒-좌정승)로 있었다. 사마천은 그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잘 다스려질 때와 어지러울 때의 일[治亂之事]에 밝고 글을 쓰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말한다. 전국시대 때 초나라는 제(齊)나라, 진(秦)나라와 더불어 3국이 대립하고 있었다. 굴원은 제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설(合縱說)을 주장했으나 초나라 회왕과 중신들은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진나라 장의(張儀)의 책략에 속아 오히려 굴원이 실각했다. 그후 초나라 상황이 점점 열세에 놓이게 되자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장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해 죽었다. 사마천은 직접 장사를 찾아가 굴원을 추모했다. “장사에 가서 굴원이 스스로 빠져 죽은 연못을 바라보며 일찍이 눈물을 떨구고 그의 사람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뛰어난 재주에도 지우를 받지 못한 인재에 대한 추도사다. 필자의 관심은 굴원보다는 가의에게 있다. 좌의정에 해당하는 좌도를 지냈으면 사실 지우를 받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가의는 한나라 초기 문제 때 사람이다. 18세 무렵인 기원전 183년 시경과 서경을 모두 암송하고 문장에도 능해 당시 하남(河南)군수가 그를 문하에 불러 아껴 주었다. 3년 후에는 순자(荀子, 기원전 316~238년)의 제자인 학자 장창(張蒼, 기원전 254~152년)을 찾아가 춘추좌씨전을 배웠다. 얼마 후 하남군수가 선정으로 이름을 내자 문제가 불러올렸고 그 군수는 문제에게 가의를 천거했다. 이렇게 해서 황제의 학술자문을 맡는 박사(博士)에 임명됐다. 이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열전에서 시대도 다르고 나라도 다른 초(楚)나라의 굴원(屈原, 기원전 343~278년)과 한나라 문제(文帝) 때의 가의(賈誼, 기원전 200~168년)를 나란히 ‘굴원 가생(賈生-가의) 열전’에 싣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윗사람의 지우(知遇)를 받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장기영 부총리는 통치권자의 절대 신임하에서 무섭게 질주하며 경제개발 계획을 이끌다가 끝내는 불명예 제대를 감수해야 했다. 자신감이 지나친 나머지 빚어진 실수의 결과였다. 박 대통령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그를 완전히 내친 것은 아니었다. 1969년 일본과의 현안 타결을 위한 특사로 그를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1972년에는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과정을 거쳐 럭키화학과 칼텍스는 호남정유라는 이름으로 50대50의 지분으로 공동투자해 1967년 5월 정식 출범했다. 호남정유가 하루 6만 배럴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준공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지금의 GS칼텍스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울산정유공장도 당초 하루 3만5000배럴의 처리 능력을 차츰 늘려 가고 있었다. 울산정유공장이 나프타 분해시설을 추가로 갖추고 가동에 들어간 것은 1973년의 일이다. 그러나 제2 정유공장 사업에서처럼 청와대가 직접 사업자를 낙점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 밖에는 실무진의 의견이 거의 받아들여졌다.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 분야의 사업자를 선정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 본인의 생각이 없지야 않았겠지만 실무진의 판단을 더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한 리더십이 당시 경제개발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그렇게 선정된 사업 참여자들이 일약 재벌의 반열에 오른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사례가 바로 풍산금속이다. 정부가 1971년 방위산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점개발 사업의 하나로 분류된 총포분야의 사업자로 풍산금속을 선정했던 것이다. 당시 방위산업 계획은 김학렬(金鶴烈) 부총리의 주재하에 구성된 태스크포스가 관할했는데, 팀장은 기획원의 황병태 운영차관보가 맡고 있었다. 그가 공공차관 과장에서 경제협력국장을 거쳐 차관보로 승진했다. 장기영씨의 뒤를 이어받은 박충훈 부총리가 종합제철 사업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김 부총리로 바뀌어 있을 때였다.
결국 장기영 부총리는 통치권자의 절대 신임하에서 무섭게 질주하며 경제개발 계획을 이끌다가 끝내는 불명예 제대를 감수해야 했다. 자신감이 지나친 나머지 빚어진 실수의 결과였다. 박 대통령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그를 완전히 내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맞지 않으면 그 부작용이 여간 아니다. 미국 마이애미에 사는 어느 교포는 유명한 광고만 믿고 그 약을 몇 재 먹고 나서 죽을 뻔했다며 하소연했었다. 온몸에 부스럼이 퍼진 데다가 악성 진물이 나는 건 둘째치고 눈썹마저 빠져서 나병환자 같다 하였다. 다행히 체질에 맞는 약초와 음식으로 일 년 만에 완치는 되었지만 사실 그런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말을 들었다. 어쨌거나 무슨 병이든 반드시 체질에 맞는 음식과 약초가 필요하다. 아토피를 앓을 수밖에 없는 체질은 네 가지나 된다. 대개의 경우 심장이 너무 커서 열이 많은 체질이 아토피에 취약하다. 폐는 피부를 주관하고 심장 열은 폐를 상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한 폐가 건강하도록 음식과 약초를 적절히 복용하면 쉽게 낫는다. 다만 이때는 신장과 통하는 찬 성질의 약으로 열을 내리는 처방이 필요하다. 그리만 하면 어린아이는 굳이 약을 먹을 것도 없이 음식만으로도 치료가 된다. 검은깨, 들깨, 현미, 서리태, 율무 등을 섞은 미숫가루를 매일매일 먹어도 감쪽같이 낫는다. 대파 중에서 하얀 부분과 양파, 무즙에다가 검은깨, 서리태, 들깨를 넣어서 달인 물도 효과가 좋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악성이어서 쉽게 낫지 않으면 그런 음식에다가 뽕나무 피, 상황버섯, 도라지, 더덕, 대추, 하수오, 토사자, 차전자 등을 함께 달여서 마셔도 쉽게 치료가 된다. 그러나 폐열에 의한 다 같은 아토피라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체질이 있다. 이런 체질은 심장은 작고 허약한데도 폐열이 심하다. 사상(四象)에서 폐가 크면 태양(太陽)이라 하는데 이는 동양의학을 부정하는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심장을 태양이라 하고 폐는 소음(少陰·열이 많은 중에 약간의 추위가 있는 것)이라 한다. 마치 불에 달군 쇳덩이가 계속해서 열이 나듯이 폐는 스스로 열을 발산한다. 특히 폐, 대장의 에너지를 표시한 문자 신이 체질공식에서 강하게 작용하면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신은 열을 스스로 발산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1987년 양력 8월 15일 오후 2시에 태어난 여성의 예를 보자. 만세력을 찾아 오행을 대입해 보면 1987년은 정묘(丁卯), 월은 무신(戊申), 일은 병신(丙申), 시는 을미이다.
대개의 경우 심장이 너무 커서 열이 많은 체질이 아토피에 취약하다. 폐는 피부를 주관하고 심장 열은 폐를 상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한 폐가 건강하도록 음식과 약초를 적절히 복용하면 쉽게 낫는다. 검은깨, 들깨, 현미, 서리태, 율무 등을 섞은 미숫가루를 매일매일 먹어도 감쪽같이 낫는다. 아토피를 앓을 수밖에 없는 체질은 네 가지나 된다.
우리도 팔레르모에서 시작하자. 의미 있는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그 지형이랄까 지세를 먼저 보게 되고 그다음에는 건축이 눈에 들어온다. 팔레르모를 보면 첫눈에 그 입지(立地)가 범상치 않다. 멀끔한 펠레그리노 바위산(Mt. Pellegrino)과 알파노 산(Mt. Alfano)을 좌우에 끼고 이 두 산을 잇는 산줄기를 병풍처럼 뒤에 두른 ‘황금분지(Conca d’Oro)’에 자리 잡고 티레노 바다에 면해 로마 쪽을 바라보는 모양새다. 배산(背山)에 더해 협산임수(挾山臨水)의 안정감이 마치 반쯤 헐어낸 원형극장 안에 아늑히 자리한 느낌이다. 풍수(風水) 공부 없이 보아도 그럴듯한 광경이다. 팔레르모는 페니키아 이래 지중해의 요충이지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노르만 시절이다. 노르만이 시칠리아를 접수한 지 70년 루제로 2세(Ruggero 영어로 Roger・1095~1154)는 1130년 독자적 왕국을 창건하고 팔레르모에 정도(定都)했던 것이다. 왕국을 개창한 일은 이탈리아의 사(史)에 전무(前無)할 뿐 아니라 거의 후무(後無)한 역사적 이니셔티브였다. 루제로의 왕국은 왕조가 바뀌면서도 국체는 이어져 후에 나폴리까지 포함하는 ‘양(兩) 시칠리아 왕국(Regno delle Due Sicilie)’이 되어 1861년 이탈리아의 통일 때까지 존속한다. 루제로 2세는 이질 문화를 포용한다는 차원을 넘어 다문화성을 왕국의 자산으로 적극 활용해 시칠리아의 전성시대를 연 현군(賢君)이다. 노르만 사람은 무사(武士)나 축산 일을 하고, 그리스인들은 교회 일과 배(船)타는 일, 아랍인은 농사짓고, 유대인은 상업과 전문직이 몫이었다.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은 비로소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을 뿐이고, 프랑스와 영국도 아직 미약하고 합스부르크가는 역사에 데뷔도 못 했던 그 시절 시칠리아 왕국은 유럽 제일의 글로벌 부국이었다. 여러 문화를 포괄하다 보니 자연히 학식도 최고 수준이어서 당대 지성의 본산 콘스탄티노플이나 코르도바와 경쟁할 정도였다. 세 개의 공식 통용어 외에 시칠리아의 토착어(vernacolo)는 또 그대로 시문학에 널리 사용되어 후일 단테의 토스카나어 사용에 모범이 되었다. 오늘날 팔레르모와 그 부근의 역사 유산 중에는 이때 시작한 역사(役事)들이 많다.
의미 있는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그 지형이랄까 지세를 먼저 보게 되고 그다음에는 건축이 눈에 들어온다. 팔레르모를 보면 첫눈에 그 입지(立地)가 범상치 않다. 멀끔한 펠레그리노 바위산(Mt. Pellegrino)과 알파노 산(Mt. Alfano)을 좌우에 끼고 이 두 산을 잇는 산줄기를 병풍처럼 뒤에 두른 ‘황금분지(Conca d’Oro)’에 자리 잡고 티레노 바다에 면해 로마 쪽을 바라보는 모양새다.
사람을 사랑한 호랑이 여인의 속마음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만나게 되는 정황부터 살펴봐야 한다. 김현과 여인은 부처님 탄신에 탑돌이를 하다가 만났다. 그건 야합(野合)이었다. 우리는 부처님 탄신을 음력 4월 초파일, 그러니까 4월 8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음력 2월 8일이 맞다. 중국의 《요사(遼史)》나 《금사(金史)》에도 부처님 탄신은 2월 8일로 되어 있고,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에도 4월이 아닌 2월에 연등을 켰다. 유명한 고려가요 〈동동(動動)〉에도 “2월 보름에 아아 높이 켠 등불 같구나”라며 부처님의 탄생을 기리는 연등회를 2월에 했음을 노래하고 있다. 2월 8일이 언제부터 4월 8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4월 8일을 부처님 탄신으로 여겼다. 음력과 양력 차이 때문에 혼선이 온 것은 아니다. 신라시대나 조선시대나 내내 음력인 건 마찬가지니 말이다. 이렇게 두 달이나 차이가 나게 된 이유는 고대(古代) 중국의 역법 때문이다. 인월(寅月)이니 축월(丑月)이니 하는 복잡한 간지(干支) 얘기는 접어 버리고, 간단히 말하자면 하(夏)·은(殷)·주(周)로 나라가 바뀔 때마다 정월(正月)을 한 달씩 뒤로 옮겼기에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나라를 세운 황제들은 기존 것을 싹 갈아엎으려고 그런 건지, 아니면 황제란 무릇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지배하는 자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키려 한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정월을 옮겨 버려 기록들이 꼬이게 되어 버렸다. 동일한 날에 부처님 탄신을 지켜도 그 시대 기록들은 각기 다른 월(月)로 기록하게 되었고 그렇게 뒤섞여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즉, 주(周)나라 4월이 하(夏)나라 2월이기에, 부처님 탄신 2월 8일이 주(周)나라 기록엔 4월 8일로 나오게 되었다. 예로부터 책력(冊曆)은 하(夏)의 것을 따라 정월(正月)을 정하기에 주나라 이후 정월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의 문면을 그대로 따서 부처님 탄신을 4월 초파일로 지키게 된 것이다.
인월(寅月)이니 축월(丑月)이니 하는 복잡한 간지(干支) 얘기는 접어 버리고, 간단히 말하자면 하(夏)·은(殷)·주(周)로 나라가 바뀔 때마다 정월(正月)을 한 달씩 뒤로 옮겼기에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나라를 세운 황제들은 기존 것을 싹 갈아엎으려고 그런 건지, 아니면 황제란 무릇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지배하는 자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키려 한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정월을 옮겨 버려 기록들이 꼬이게 되어 버렸다.
‘기능원’ 범주의 직업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은 당시 중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위기 이전부터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이미 공급과잉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기아, 현대, 대우로 3파전을 벌이던 기존의 승용차 생산시장에 삼성이 1990년대 전반 새롭게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공급과잉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국민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던 기아차를 가장 먼저 부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마침내 기아차는 1997년 10월 법정관리로 넘어갔고 결국 1998년 말 재벌회사인 현대차에 인수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아차는 물론 기아차 계열사의 노조는 인원삭감, 임금동결 등의 자구 노력을 기울이며 회사의 경영진과 협조하며 그룹 살리기를 추진했으나 결국에는 모두 실패했다. 당시 기아차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기아중공업에서 ‘기계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던 유한식의 2015년 3월 증언은 비장하다. “1998년 7월 전체 생산직 사원 2047명 가운데 436명을 자체적으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채권단에 ‘화의’를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아중공업은 현대위아에 1998년 말 합병되었고 저는 ‘점령군’에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업무를 마무리하고 2003년 3월 스스로 퇴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기아차를 흡수한 현대차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경쟁하던 회사를 인수했다는 경영의 측면에서는 승자일 수 있어도, 회사 내부의 노동자 입장에서는 사실상 기아차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1997년 위기를 겪으며 국내의 자동차 수요는 전년도에 비해 반 토막이 났고 그에 따라 현대차 공장의 가동률도 반 토막이 났기 때문이다. 경영의 위기는 대규모 감원의 필요성으로 이어져 마침내 회사는 1998년 8월 전체 생산직 근로자 4만6000명 가운데 1만여 명에 달하는 인력감축을 노조와 합의했다. 이 인력감축에는 ‘자연감소’ 및 ‘희망퇴직’은 물론 ‘무급휴직’ 그리고 나아가서 ‘정리해고 277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아, 현대, 대우로 3파전을 벌이던 기존의 승용차 생산시장에 삼성이 1990년대 전반 새롭게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공급과잉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국민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던 기아차를 가장 먼저 부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마침내 기아차는 1997년 10월 법정관리로 넘어갔고 결국 1998년 말 재벌회사인 현대차에 인수되었다.
사람을 늙고 병들어 죽게 하는 절대원리는 명(命)에 있다. 명은 섭리(燮理)이고 섭리는 음양의 변화규율이며, 음양의 변화규율은 곧 기후변화이다. 기후변화가 늙음을 진행시키고 병을 유발하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절대자인 셈이다. 가을바람에 풀잎이 마르고 시들어 가듯 사람의 몸도 건조한 가을에 마르고 늙는다. 건조한 날씨에 몸의 진기(眞氣)인 정(精)의 원료라 할 수분이 빠져나가니 늙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수분을 빼앗아 늙음을 빠르게 진행시키는 건기(乾氣·건조)를 비롯해 수분을 증발시키는 서기(暑氣·더위), 몸을 수축시키고 체온을 빼앗는 한기(寒氣·추위), 몸을 오염시켜서 병균을 자생시키는 습기(濕氣), 몸을 확장시키고 체온을 증가시키는 열기(熱氣), 육(肉·살)의 정기를 말리는 풍(風·추위 중 양기) 등 여섯 가지 성질을 발산하는 사계절의 기후변화가 생로병사의 주관자인 것이다. 이러한 육기(六氣)는 매년 질서정연하게 순차적으로 오고 가는데 초목을 기르다가 시들어 죽게 하듯 육신을 변화시킨다. 지구가 한 번 공전하면 사계절이 지나가고 사람은 일 년만큼 늙는다. 열 번 공전하면 계절이 열 번 바뀌고 10년 늙는다. 늙는 중에 병이 들거나 죽기도 하는 이유도 육기를 몰고 다니는 계절인 것이다. 지구에 몸을 싣고 지구와 함께 돌아가면서 순차적으로 오고 가는 계절의 기후변화에 육신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태어난 시기의 계절과 날짜 그리고 시간을 주관한 기후의 성질과 에너지가 체질을 확정짓는다. 타고난 체질 역시 계절의 기후변화에 상응해 어려서는 초목처럼 싱싱하게 잘 자라지만 지구의 자전·공전 횟수에 비례해 점점 시들어져 늙고 병들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질서정연하게 반복해서 오고 가는 기후변화를 표시한 문자이자 부호인 음양오행을 태어난 시기에 대입하여 해석하면 타고난 체질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체질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나이에 따라서 달라진다. 비록 태어날 때 체질이 확정되었다고는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기후변화가 끊이지 않으니 체질도 따라서 바뀌기 마련이다. 체질이 바뀌지 않는다면 생명은 영원할 것이다.
수분을 빼앗아 늙음을 빠르게 진행시키는 건기(乾氣·건조)를 비롯해 수분을 증발시키는 서기(暑氣·더위), 몸을 수축시키고 체온을 빼앗는 한기(寒氣·추위), 몸을 오염시켜서 병균을 자생시키는 습기(濕氣), 몸을 확장시키고 체온을 증가시키는 열기(熱氣), 육(肉·살)의 정기를 말리는 풍(風·추위 중 양기) 등 여섯 가지 성질을 발산하는 사계절의 기후변화가 생로병사의 주관자인 것이다.
1900년대 초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시대의 역사는 한반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유산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 군산이다. 1899년 개항한 군산항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발판이 됐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군산시 장미동·월명동·신흥동 등 군산 내항 일대에는 일제시대 군산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동신 시장은 이 자원을 개발해 문화관광 도시로 도약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직도사격장 문제를 해결하자 ‘근대 문화도시 조성사업’에 집중했다. 개인 소유였던 일제강점기 유산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고 시에서 관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개인 소유이지만 등록문화재로 지정 후에 군산시에서 관리했다.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은 군산시에서 매입했다. 2008년 군산 경관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도시 전반에 걸친 경관계획과 함께 근대 역사문화 경관을 조성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이 당시에 ‘근대 문화벨트화 사업’과 ‘근대 역사경관 조성사업’ 등 세부 계획을 마련했다. 두 사업은 근대 문화도시 조성사업의 근간이 됐다. 군산시는 2011년 9월 30일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완공하면서 문화관광 도시가 됐음을 선포했다. 총 182억원이 들어간 이 박물관은 1920~40년대 항일의 역사와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군산의 특수성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군산 원도심인 장미동에 들어선 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총넓이 4248m² 규모로 지어졌다. 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모은 유물만도 총 4000여 점. 이 중 단체와 시민, 학생 등이 기증한 유물이 2250여 점에 이른다. 1930년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한 ‘근대생활관’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1930년대 군산항의 주기능을 담당했던 내항(內港)의 모습과 영명학교 등이 복원돼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근대 군산의 역사적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조성된 이 박물관 건립으로 근대 문화도시 조성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개관 첫해 10만여명이었던 관람객이 지난해 100만명을 넘었다.
1900년대 초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시대의 역사는 한반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유산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 군산이다. 1899년 개항한 군산항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발판이 됐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군산시 장미동·월명동·신흥동 등 군산 내항 일대에는 일제시대 군산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데 지금에 우리의 생활상태, 즉 경제관계는 향상이 되어 있던가? 또한 퇴보가 되었던가? 이것이 우리의 가장 중대한 문제 아니 사활문제이다. 옛날에는 천한 직업을 강제로 하여 왔지만은 박해를 당하던 대신에 인권을 빼앗긴 보수로서 울면서 겨자 먹기로 간신히 생명만은 보전하여 왔다. 지금에 와서는 더러워하고 침 뱉고 그것이라면 천리로 만리로 구축하려던 소고기 장사 가죽장사를 누구가 하는가? 가죽장사의 순전한 이익은 저—신사 양반들의 독차지가 되었고 우리 동무 중 어리석은 분네들은 다만 사소한 전푼에 팔려서 동무 백정의 이문을 뺏기고 눈이 새빨개지며 소고기 장사로 말하더라도 근래에는 전 조선의 어느 지방 할 것 없이 비사원(보통사람)의 영업자가 날로 증가한다. 그 비사원 영업자 즉, 새로 난 백정이 자꾸~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와 중대한 사건이 뒤를 이어 발생된다. (중략) 그러면 백정도 사람인 이상에 사회단체 안에 있는 백정일 것이다. 사회운동 안에 있는 것은 반듯하다. 그렇지만은 우리는 이—인간사회에서 최하층의 밑바닥에서 짓밟히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을 박탈당하였다 함으로 가장 간절히 그 인권해방에 열중이 된 것이다. 하지만은 자유를 찾자, 평등을 찾자 행복을 찾자 함에 있어서는 일반사회 단체와 동등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사회단체의 운동이나 우리 형평단체의 운동이나 다—동일한 사회운동 즉 사람의 운동인고로 제휴를 면치 못할 것이며 공동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제휴’라 함은 손을 마주잡는다는 말이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사회운동 즉 사람의 운동의 정의란 저—태양(해)의 광명과 같다. 검은 장막의 속과 같이 저 암흑터에 잠겼던 천지만물이 그 고고한 광선에 비쳐서야 비로소 그 자태를 나타내게 되며 천태만상을 일어나니 사람의 운동, 즉 사회운동이 인류의 역사적 발전을 따라 점점 장족의 진보가 되어서 여성운동 소작운동 노동운동 수평운동 무산운동 형평운동이 생겼다 하면 각기 그 주의 주장의 목적하는 바 광명은 경우가 동일함으로, 동지단체의 관계를 가졌다 함으로 동지단체의 관계가 있고 우의 단체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가 있는 이상에 어찌 제휴, 즉 손을 마주잡지 않으며 공동으로 운동하지 않으랴! ‘합리’라 함은 진리에 적당하다는 말이다. ‘건설’이라 함은 만들자는 말이다. ‘합리적 사회’라 함은 진리에 적당한 사회라는 말이다. 즉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말이다. 동무들이여! 만천하 애중이여! 소리를 같이하며 힘을 같이하야 불평의 물결이 넘치는 고해를 헤쳐 나서 이상의 천국, 이 세상 극락, 즉 형평사회를 건설하자-.
옛날에는 천한 직업을 강제로 하여 왔지만은 박해를 당하던 대신에 인권을 빼앗긴 보수로서 울면서 겨자 먹기로 간신히 생명만은 보전하여 왔다. 가죽장사의 순전한 이익은 저—신사 양반들의 독차지가 되었고 우리 동무 중 어리석은 분네들은 다만 사소한 전푼에 팔려서 동무 백정의 이문을 뺏기고 눈이 새빨개지며 소고기 장사로 말하더라도 근래에는 전 조선의 어느 지방 할 것 없이 비사원(보통사람)의 영업자가 날로 증가한다. 그 비사원 영업자 즉, 새로 난 백정이 자꾸~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와 중대한 사건이 뒤를 이어 발생된다.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가운데서 이승만이 가장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조병옥(趙炳玉)이었다. 미군정부 3년 동안 경찰 수장으로 일했던 조병옥은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중국, 필리핀, 미국을 방문하고 유엔대표단의 고문으로 파리 유엔총회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처음 조각작업을 할 때에 조병옥에게 외무부 장관 자리를 약속하면서 외무부 차관으로는 임영신(任永信)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2, 3일 지나서 이승만은 조병옥을 불러 “외무부 장관보다 더 좋은 자리를 맡으라”면서 대통령특사로 각국을 순방하고 유엔한국대표단의 고문으로 파리 유엔총회에 참석하라고 말했다.6) 그러나 이승만이 자신에게 외무부 장관 자리를 약속했다는 조병옥의 증언은 석연찮은 점이 없지 않다. 조병옥에게 외무장관 자리를 약속하면서 이승만은 동석한 김성수(金性洙)에게 “조 박사는 외무부 장관 취임을 승낙하였으니 인촌(仁村)도 재무부 장관 취임을 승낙하도록 하시오”하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조병옥의 말로 미루어 보면 조병옥에 대한 외무부 장관 약속은 김성수를 재무부 장관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한민당을 제압하려고 한 이승만의 노련한 제스처였는지 모른다. 한민당의 다섯 사람 총무의 한 사람이었던 조병옥은 경무부장직을 맡으면서 한민당의 당적을 버리라는 하지(John R. Hodge) 장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계속 당적을 유지했다. 그러한 사정은 8월18일에 프란체스카 명의로 임병직(林炳稷)과 올리버만 보라면서 보낸 만리장서로도 짐작할 수 있다. 프란체스카는 조병옥과 상대할 때에는 최근 몇 년 동안 조병옥이 주로 지지해 온 것이 한민당 안의 흥사단 분자들이었고 또 이 분자들은 하지 장군과 친근하게 협조했는데, 하지의 으뜸가는 고문은 흥사단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썼다. 그것이 왜 하지 장군이 이승만을 반대하는 행동을 했는지를 말해주는 이유라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조병옥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경찰행정을 둘러싼 조병옥, 윤치영(尹致暎), 장택상(張澤相) 세 사람의 쟁투를 조정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라고 썼다. 그리고 조병옥과 장기영(張基永)은 널리 알려진 술고래인데,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은 그들이 술과 여자와 장광설을 동반하는 비싼 연회의 동양적 습성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도 덧붙였다.7)
이승만은 처음 조각작업을 할 때에 조병옥에게 외무부 장관 자리를 약속하면서 외무부 차관으로는 임영신(任永信)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2, 3일 지나서 이승만은 조병옥을 불러 “외무부 장관보다 더 좋은 자리를 맡으라”면서 대통령특사로 각국을 순방하고 유엔한국대표단의 고문으로 파리 유엔총회에 참석하라고 말했다.
“관운장, 이 조조는 군사를 다 잃고 기세까지 꺾여 이 꼴이 되었소. 장군께서 옛정을 생각해 주시기 바랄 뿐이오.” “이 관우는 전에 승상의 은혜를 입었으나 그 은혜는 원소(袁紹)의 두 장군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를 죽여 이미 갚았다고 생각하오. 안타깝게도 오늘은 내가 공무(公務)를 수행하는 날이오.” “생각해 보시오. 지난날 유비(劉備)에게 되돌아가는 장군을 붙잡아 죽일 수도 있었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소. 부디 그 점을 기억해 주기 바라오. 관운장은 의리를 중요시한다고 나는 알고 있소.” 관운장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지난날 조조가 그에게 베푼 은혜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길을 터주도록 하라.” “고맙소. 관운장.” 관운장의 군사들이 놀라서 망설이는 사이 조조와 조조의 군사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조조는 후일 오나라가 관운장의 목을 베어 자신에게 바쳤을 때 슬피 울고 그의 비(碑)를 나라 도처에 세웠다. 하여 오늘날 관운장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촉나라로서는 조조를 놓아준 관운장은 최대의 역적이었다. 공명은 관운장을 당장 처형하기를 바랐으나 유비가 이를 허락지 않았다. 이에 공명은 촉나라의 운이 다할 것임을 예감하고 통곡하였다. 삼국지 전체 가운데 필자가 가장 충격을 받은 사건이 바로 관우가 조조를 놓아준 장면이다. 이때 만일 관운장이 조조를 처형하였다면 조조의 수많은 군대는 그 출신성분이 모두 다른 군인들이라 오합지졸(烏合之卒)이 되어 각자 자기 고장으로 도주해 조조의 나라는 바로 망해버렸을 것이다. 군사적으로 볼 때 관운장의 태도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후에 오나라가 관운장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냈을 때 조조는 관운장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조조는 관운장의 의(義)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 천하에 관운장의 위대함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그래서 관운장은 상업의 신이 되었다. 관운장이 조조를 없앴다면 비록 의리 없는 자 소리를 듣더라도 촉의 최고 애국자가 되었겠지만 그는 조조를 그냥 보내줌으로써 중국의 상업신(商業神)이 된 것이다. 상업에서 그 정도의 의리를 지킨다면 절대로 망하는 법이 없다. 대부분의 상인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길을 터주도록 하라.” “고맙소. 관운장.” 관운장의 군사들이 놀라서 망설이는 사이 조조와 조조의 군사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조조는 후일 오나라가 관운장의 목을 베어 자신에게 바쳤을 때 슬피 울고 그의 비(碑)를 나라 도처에 세웠다. 하여 오늘날 관운장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참석자들은 행정, 산업, 농업-상업-조달, 재정, 철도-교통의 5개 분과로 나뉘어 분과회의를 열었다. 분과회의는 레베데프, 로마넨코, 프루소프 등 소련군 군사회의 위원들이 각각 맡아서 진행시켰다.65) 분과위원회에서 토의된 안건은 농산물 확충과 소련군을 위한 식량공출 문제, 군수공장을 민수공장으로 개편하는 문제, 금융재정문제, 지방기구의 정비 및 통일문제였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심각한 토의안건은 농산물 확충과 소련군을 위한 양곡공출문제였다. 양곡공출은 소련군이 각도별로 할당했는데, 참석자들은 “도별로 붉은 군대의 엄청난 숫자의 양곡공출을 할당받고도 아무런 불평과 반대를 표명하지 못했다”고 한다.66) 그러나 곡물수매 사업은 부진하여 1945년 연말 현재 목표량의 20퍼센트밖에 달성하지 못했다.67) 평안북도인민위원회의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함석헌(咸錫憲)은 “한마디로 해서 모든 것이 우리 생각과는 어긋나는 것뿐이었다”고 회고했다.68) 10월11일의 전체회의에서는 소련군사령부가 제출한 「북조선자치기관 조직의 기본원칙」이 채택되고, 북한에 중앙집중적인 경제관리기구를 설치하기 위한 결의들도 채택되었다.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끝나자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이튿날로 「북조선주둔 소련군제25군사령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69) 그것은 스탈린 비밀지령의 골자를 일반주민들에게 재천명하고, 구체적인 조치들을 명령한 것이었다. 「성명서」는 모든 반일 민주주의 정당 및 단체들의 결성과 활동을 허가한다고 천명하면서, 그러나 그러한 정당이나 단체들은 자신들의 강령 및 규약과 함께 지도기관의 인원명부를 인민위원회와 군경무사령관에게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제2항 제1조, 제3조). 그리고 모든 무장대는 해산하고 모든 무기와 탄약과 군용물자는 군경무사령관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 대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임시인민위원회들은 소련군 사령부와의 협의 아래 “평민 중에서”일정한 수의 보안대를 조직하는 것을 허가한다고 했다(제2항 4조). 이 명령에 따라 10월 12일을 기하여 모든 무장부대는 해산되고, 지방치안 목적으로 새로 조직되는 보안대에는 소련군 사령부가 ‘평민’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70)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끝나자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이튿날로 「북조선주둔 소련군제25군사령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스탈린 비밀지령의 골자를 일반주민들에게 재천명하고, 구체적인 조치들을 명령한 것이었다. 「성명서」는 모든 반일 민주주의 정당 및 단체들의 결성과 활동을 허가한다고 천명하면서, 그러나 그러한 정당이나 단체들은 자신들의 강령 및 규약과 함께 지도기관의 인원명부를 인민위원회와 군경무사령관에게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제2항 제1조, 제3조).
원자력원은 이때를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할 적기로 판단했고, 동시에 정부의 시책에 기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방사선 농학연구에 가장 관심을 보인 인물은 당시 김학열(金鶴烈) 경제기획원 차관이었다. 박익수 전 위원장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행정직 관료들은 반대하지 않았으나, 원자력연구소 측에서는 방사선농학연구소 설립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료나 농업 관계의 연구 분야에 치중하면, 원자로에 관계한 기초연구가 소홀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의 설명이다. “원자력원 상임위원 자격으로 서울대 농대 김호직(金浩稙) 학장과 심상철(沈相哲) 교수(후에 방사선농학연구소장)를 찾아가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했죠. 방사선에 의한 종자 개량, 시비법 개량과 농산물 장기저장 방법에 관한 사진 3장을 얻어 김학렬 장관의 자택을 찾았습니다. 김학렬 장관과 나는 막역한 사이였어요. 3장의 사진을 김학렬 장관에게 보여주며 ‘방사선에 의한 농학연구는 정부의 식량 증산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965년 초 김학렬 차관은 내게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정하는 심의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장기영(張基榮) 경제기획원 장관 주재로 열린 심의회의에서 방사선 농학연구에 의한 식량 증산과 농업 여건 개선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박익수 당시 상임위원은 심의회의에서 사진을 치켜들고, “감자에 방사선을 적당량 조사해 감자의 눈에서 싹이 트지 않고 장기간 저장할 수 있는 실증적 사진이 여기 있다”고 하자 참석자들은 눈이 휘둥그레했다. 김학렬 차관이 회의가 끝난 후 “오늘 매우 유익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인사했고, 박 위원은 “내년도 예산에 연구소 설립이 될 수 있도록 반영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차관은 “알았소, 잘해봅시다”라고 화답했다. 원자력위원회에서 설립안을 통과시키자 1965년 4월 생물학연구실에서 농학연구를 겸하던 것을 ‘농학연구실’로 임시 분리 독립시키고, 초대실장에 한창열(韓昶烈) 전북대 농과대학장을 임명했다.
방사선 농학연구에 가장 관심을 보인 인물은 당시 김학열(金鶴烈) 경제기획원 차관이었다. 원자력위원회에서 설립안을 통과시키자 1965년 4월 생물학연구실에서 농학연구를 겸하던 것을 ‘농학연구실’로 임시 분리 독립시키고, 초대실장에 한창열(韓昶烈) 전북대 농과대학장을 임명했다. 원자력원은 이때를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할 적기로 판단했고, 동시에 정부의 시책에 기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한데 거기에 대하야는 무엇보담도 제일로 우리의 다수가 한 덩어리로 묶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즉 다수 단결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한 동네는 동네로 단결이 되고 한 고을은 고을로 단결이 되고 한 도는 도로서 단결이 되어서 조선 각처의 총단결 즉, 조선 형평사 총본부이니 결국은 조선 각지의 우리 계급 40만이 한 몸뚱이와 같이 단결이 되는 것이 필요타 한다. 이와 같은 의미로서 형평사라는 조직이 생겼다. 형평이라 함은 이 인간세상을 이 인간사회를 저울로 달아서 평탄하게 고른다 하는 의미이다. (5행 삭제) 함으로 지금에 와서는 우리 형평사가 남병산에 동남풍이 불듯 비온 뒤에 죽순처럼 곳곳마다 자유를 부르짖고 평등을 요구하며 정의의 함성으로 이미 잠든 사람의 귀청을 요동시키었다. 하지만은 아직 우리 동족의 일부분과 또는 일반 보통사람 사이에는 깊었던 잠을 깨지 못한 이가 많다. 함으로 우리들은 불민함을 무릅쓰고 근래 8년 동안을 두고 동서 사방으로 우리의 동족을 위하야 인간사회를 위하야 자유를 찾자, 평등을 찾자, 행복을 찾자는 대사업에 노력한다. 이것이 즉 형평운동이다. 우리들은 제일로 남에게 의뢰하는 생각을 두지 못할 것이다. 의뢰하는 것이 곧 자기를 무시하는 것인 고로 남에게 모욕을 면치 못하나니 우리는 귀족의 힘도 의뢰치 못할 것이며, 신사 학자의 힘도 의뢰치 못할 것이며, 부자 양반의 힘도 의뢰치 못할 것이다. 우리를 천대하는 자, 우리를 수고롭게 하는 자, 우리를 학대하는 자에게 대하야는 다만 끝까지 싸울 뿐이다. 함으로써 이 글을 씀에 대하야서도 관리와 학자와 명사와 저—당대에 명성이 혁혁한 양반님네에게 이 책을 보아주시기는 조금도 생각 끝에도 두지 않는다. 우리들을 백정놈이니 천인이니 하야 모욕하고 천대하는 모든 거룩하신 이에게도 보아주시기를 원치 않는다. 다만 우리의 동족이 되는 형평계급의 여러분, 수고를 같이하며 슬픔을 같이하며 원수를 같이하며 피의 눈물을 같이 떨어뜨리는 우리의 형제에게 반듯이~ 깊이~ 이 글의 의미를 깨쳐 내기를 간절히 원하고 빌 뿐이다.
한 동네는 동네로 단결이 되고 한 고을은 고을로 단결이 되고 한 도는 도로서 단결이 되어서 조선 각처의 총단결 즉, 조선 형평사 총본부이니 결국은 조선 각지의 우리 계급 40만이 한 몸뚱이와 같이 단결이 되는 것이 필요타 한다. 이와 같은 의미로서 형평사라는 조직이 생겼다.
국가안보 차원에서 미소가 취급되던 이 시기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미소는 ‘센다이미소(仙台味噌)’다. 센다이번(仙台藩)의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1567~1636년)는 센다이를 전국 최강 번의 하나로 이끈 명장(名將)이다. 그는 번 내의 운하를 정비하고 농지를 개척하는 한편, 조카마치(城下町·성 주위의 상업지구)에 전국 각지에서 능력 있는 상인, 기술자, 학자를 불러 모아 거주시킴으로써 경제와 문화의 융성을 도모한다. 부국강병책을 가장 성공적으로 추진한 다이묘 중의 하나인데, 그의 일화 중에서 센다이미소와 관련된 일화가 유명하다. 미소의 중요성에 일찍이 눈뜬 마사무네는 품질, 영양, 보관성이 우수한 미소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마사무네의 목표는 성이 포위되어도 1~2년을 외부의 보급 없이 성내에서 자급자족하며 농성(籠城)하는 방어력의 획득이었다. 마사무네는 이를 위해 조슈마카베군(常州真壁郡·현재의 이바라키현) 출신의 미소 제조 쇼쿠닌(職人·전문기술자) 마카베야이치베(真壁屋市兵衛)를 연공(年貢) 현미 백석(百石)에 초빙하여 미소 제조를 의뢰한다. 작은 번의 오모테다카(表高·영지의 표준 미곡 산출량)가 1만 석부터 시작하는 점을 감안할 때, 100석의 연공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마사무네는 마카베야이치베의 스카우트와 함께 성(城) 아래에 ‘오엔소구라(御塩噌藏)’를 건립하도록 지시한다. 오엔소구라는 미소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방(工房)으로 일본 최초의 공업적 미소 생산시설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마카베야이치베는 고메미소(米味噌) 양조법에 능한 기술자였다. 쌀과 콩을 함께 사용하는 고메미소는 콩의 단백질과 쌀의 탄수화물을 동시에 섭취할 수 있어 전투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마카베야이치베는 쌀누룩을 활용해 염도를 높이면서도 발효가 진행되는 양조법(釀造法)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는 미소의 보존기간을 크게 연장시켰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전략물자를 개발하고 대량으로 생산한 것이다(일본의 미소는 한국의 된장과 달리 자연발효 메주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배양된 누룩균을 사용하여 발효시킨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된장 제조 공정을 술과 마찬가지로 ‘釀造’라고 표기한다).
마사무네는 마카베야이치베의 스카우트와 함께 성(城) 아래에 ‘오엔소구라(御塩噌藏)’를 건립하도록 지시한다. 오엔소구라는 미소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방(工房)으로 일본 최초의 공업적 미소 생산시설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마카베야이치베는 고메미소(米味噌) 양조법에 능한 기술자였다.
뎃포의 무기화를 위해서는 제반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뎃포는 ‘화약’의 존재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화약은 인류 3대 발명품이라 불릴 정도로 역사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친 기술적 개가(凱歌)의 상징이다. 그만큼 15세기 이전까지 화약 제조 기술은 최중요 전략기밀로 취급되었다. 원(元)나라는 특수 관계의 부마국(駙馬國) 고려에도 그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다. 엄격한 통제를 뚫고 최무선이 원의 상인을 통해 어렵사리 카피한 것이 한반도 화약 역사의 시초였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중국의 화약 기술을 흡수한 고려는 당대의 화약 선진국이 되었다. 14세기 말에 이미 완성도 높은 화약을 제조하여 그 폭발력을 인명 살상력으로 전환한 무기를 제조하여 실전에 활용했다. 그를 이어 받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나 조선의 화약 기술은 다른 의미에서 보안을 유지해야 했다. 타국(他國) 전파를 우려하기 이전에 중국에 버금가는 화약 기술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괘씸죄로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한반도는 화약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단절된 관계였다. 현대 개념으로 말하면 원이나 명(明)은 고려나 조선이 우방국이 된 다음에도 화약이라는 전략기술을 이전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화약은 초석(礎石·saltpeter), 유황(sulfur), 숯(carbon)을 각각 75:10:15의 비율로 혼합하여 제조한다. 이들 중 핵심은 초석이다. 초석은 자연 채취가 아니라 제조(manufacture)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 공정이 꽤 복잡하여 우연적으로 그를 터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고려나 조선은 화약 제조법을 획득하기는 하였으나, 기술이 있다고 원하는 만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재료의 확보였다. 한반도에는 초석이 부족했다. 보다 정확히는 초석의 원료가 되는 질산칼륨을 다량 함유한 염초토(焰硝土)가 부족했다. 동물의 분변(糞便)에 소변의 요소(尿素)가 가해져 장시간 박테리아의 분해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이 천연 질산칼륨인데, 한반도는 염초토 생성을 위한 인구나 가축의 수가 부족하였다. 인위적으로 초석 생산을 늘리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화약은 초석(礎石·saltpeter), 유황(sulfur), 숯(carbon)을 각각 75:10:15의 비율로 혼합하여 제조한다. 이들 중 핵심은 초석이다. 초석은 자연 채취가 아니라 제조(manufacture)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 공정이 꽤 복잡하여 우연적으로 그를 터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 대표적 명소가 노르만 궁(Palazzo dei Normanni)이다. 아랍인들이 지어놓은 성채를 재활용해 왕궁으로 증축했다. 1130년 루제로가 왕이 되자마자 착공해 10년 걸려 지었다. 2층에 왕실 전용 거소(居所)들의 모자이크 장식과 집기들이 이국적으로 볼 만하지만 백미는 역시 팔라티나 경당(Cappella Palatina)이다. 사실 경당(敬堂·cappella·영어의 chapel)은 개인이나 가족을 위한 사적인 예배 공간이다. 일반 신도들에게 개방하는 공공의 예배 장소인 교회가 신도들의 외경심을 일으키기 위해 위엄 있게 내외를 꾸미는 것과 달리 경당은 대개 안에 들어서면 잔잔한 감탄은 몰라도 눈이 휘둥그레지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이곳은 큰 예외다. 왕의 경당임을 감안해도 유례없는 호화 성장(盛裝)이다. 들여다보면 역시 3개 문화(라틴, 그리스, 이슬람)가 혼융하는 이채로운 공간이다. 외부세력으로서 새로이 왕국을 출범시키면서 세 그룹의 핵심 토착민들을 고루 품으려는 노력의 조형적 표현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둥과 기둥머리 장식, 비잔틴의 모자이크, 아랍식의 아치 등을 두루 동원하였다. 석회동굴의 종유석(鍾乳石)을 연상시키는 천장 장식(stalactite ceiling)은 스페인 그라나다의 유명한 알함브라 궁류(流)의 영락없는 이슬람이다. 기독교 스토리의 형상적 표현도 독특하다. 베드로나 바울의 순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등은 과감히 생략하고 승리와 기적의 얘기들만 연출했다. 중앙 후진(後陣)의 그리스도 상도 고난의 예수가 아닌 ‘최고 지배자 그리스도(Cristo Pantocratore)’의 당당한 모습이다. 군데군데 기록을 위해 새겨넣은 자구(字句)들도 모두 세 가지 언어로 동시에 표기했다. 근본을 묻지 않고 토착 신민들 모두의 눈과 머리에, 이미지로써 또 말로써 새로운 왕권의 정당성을 각인하려는 노력이 역연하다. 먼바다 항해와 낯선 땅 정복을 전문으로 하는 노르만 조상들이 해로(海路) 만 리 시칠리아에 와 사라센을 몰아낸 지 70년. 루제로의 왕국은 이렇게 야심 찬 미래를 기약했으나 두 세대 만에 직계 후손이 없어 모계인 호엔슈타우펜 집안에 왕국을 넘기고 만다.
그 대표적 명소가 노르만 궁(Palazzo dei Normanni)이다. 아랍인들이 지어놓은 성채를 재활용해 왕궁으로 증축했다. 2층에 왕실 전용 거소(居所)들의 모자이크 장식과 집기들이 이국적으로 볼 만하지만 백미는 역시 팔라티나 경당(Cappella Palatina)이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인 오사카(大板)이다. 오사카의 옛 이름은 ‘나니와’(難波, 浪速, 奈波 등 다양한 한자 표기가 있다)다. 나니와는 일본의 고대사(古代史)에서 대(對)한반도 교류 창구로서의 의미가 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의 문물 전수에 국가 발전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도래인(渡來人)들은 야마토(大和) 정권의 국가 체계 확립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한반도인들이 야마토 정권의 핵심부인 나라(奈良) 일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규슈를 거쳐 세토 내해(內海)에 진입하여 나니와에 상륙한 후, 육로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시간과 불편을 줄일 수 있었다. 이 길은 조선통신사들이 이용한 길이기도 하다. 7세기 이후 선진 문물 도입을 위해 중국에 파견된 견수사(遣隋使)나 견당사(遣唐使)가 출발지로 삼은 곳도 나니와 인근 스미요시(住吉)였다. 세토 내해의 동단(東端)이자 남태평양 연안에 위치하여 대륙과 한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도 불편할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뱃길이 가장 효율적인 교통로였다는 점과 나라와의 지리적 접근성 등을 감안할 때, 나니와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야마토 정권이 나라분지 일대에 도읍을 잡고 그 주위를 맴돈 사정도 대외교류 창구인 나니와 일대와의 연계를 의식하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특이하게 몇몇 시기에는 아예 나니와로 수도를 이전한 경우도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제16대 닌토쿠(仁德) 천황이 나니와에 다카쓰궁(高津宮)을 조성하여 도읍으로 삼는 한편, 일대의 하천과 제방을 정비하고 농경지를 넓히며 선정(善政)을 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의 왕조 연대를 기계적으로 서력(西曆) 환산하면 4세기 초반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어지럽게 흘러내리는 하천이 뒤엉켜 사구(砂丘)와 갯벌로 이어지던 하구(河口) 지형의 나니와를 바다 진출입과 인간 거주에 용이한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인위적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인 오사카(大板)이다. 오사카의 옛 이름은 ‘나니와’(難波, 浪速, 奈波 등 다양한 한자 표기가 있다)다. 나니와는 일본의 고대사(古代史)에서 대(對)한반도 교류 창구로서의 의미가 있다.
(서춘은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언론인. 2·8독립선언 조선유학생 대표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편집자 주) 참 약주 좋아하시지요. 꼭 오후에 댁으로 가시는 길에는 의례히 들러 가시니까요. 그러니까 어쩌다 들르시는 날이 있으면 도리어 저희가 궁금할 만하니까요. 오시면 두 분 아니면 세 분 친구나 함께 오시지 더 많이 여러분이 같이 오시는 적이 별로 적습니다. 술을 잡수시되 격 있게 잡수십니다. 척척 이야기를 해가면서 잡숫지 아무리 취해서도 연거푸 폭배로는 안 잡수십니다. 이렇게 한 잔 두 잔 다섯 잔쯤이 넘어서부터 그때는 그 작은 키를 돋움질해 가며 농담·재담·괴담이 한데 엉켜서 잔 수를 따라서 상술집 안주 나오듯 합니다. 그도 그렇거니와 같이 오신 손님 중에서 내시는 술이면 여간해서 가실 생각도 안 하시지만 가시자는 말씀도 안 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선생이 어느 때고 혼자 오시는 날이면 가슴이 성큼 합니다. 왜요? 혼자 오시면 몇 잔 안 잡숫고 가시니 말이지요. 가다가 어느 때는 단 한 잔만 잡숫고 가시는 때도 있으니까요. 그때는 어떻게 하시냐고요? 그런 때도 역시 댁으로 가시는 길이니까 저녁때 더구나 술꾼으로 출출한 김에 한 잔 생각이 무럭무럭 날 때이지요. 이랬던저랬던 하여간 들르시니까요. 쓱 들어서시면서 곧 술청 앞으로 오십니다. 이렇다저렇다 말씀 없고 “큰 거로 한 잔 부~” 큰 것이라니 막걸리 말이지요. 벌써 알아차리고 한 사발 듬뿍 드립니다. 그러면 놓기가 무섭게 쭉 마시시고는 김치쪽 한 점을 집으신 뒤에 “콩 한 잔 주~”하고는 손을 내밀고 일변 왼손을 펴시면 사발 속으로 땡그랑 오전 한 푼이 나자빠집니다. 일변 안주로 받은 콩 한 잔 안주는 주머니로 들어가며 선생의 한 발은 문밖을 내디디십니다. 그 밖에 또 무슨 이야깃거리요? 이런 때가 있지요. 어느 때 혹 딴 손님과 두 분이 오셔서 같이 오신 그 손이 내십니다. 그러다가 마침 다른 측 아시는 손님이 들어오시면 그때는 또 그편 손님들이 한 잔 두 잔 권하십니다. 그런 때에는 같이 온 손님은 한구석에서 적적하게 계십니다. 이런 경우에 만약 먼저 같이 오신 손님보다 나중 오신 편 손님이 아시는 분이 많고 술잔이나 먹을 만치 나갈 손님이면 미안 여부없이 먼저 같이 오신 손님께는 “인제 고만 먹읍시다”하면 그 손님은 자미가 없어서도 셈을 하십니다. 그러면 뒤미쳐서 “나는 이분들과 할 말이 있어 실례합니다”하고 젓가락은 잡은 채 계시니 그 손은 가지 별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말씀을 막 해서 괜찮을까요?
그러기에 그 선생이 어느 때고 혼자 오시는 날이면 가슴이 성큼 합니다. 술을 잡수시되 격 있게 잡수십니다. 척척 이야기를 해가면서 잡숫지 아무리 취해서도 연거푸 폭배로는 안 잡수십니다. 참 약주 좋아하시지요. 오시면 두 분 아니면 세 분 친구나 함께 오시지 더 많이 여러분이 같이 오시는 적이 별로 적습니다. 꼭 오후에 댁으로 가시는 길에는 의례히 들러 가시니까요.
나호트카 공단 개발은 당초 330만m2(100만 평)를 개발하기로 했으나, 역시 지지부진했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19만8000m2(6만 평)만 개발하기로 합의했으나, 여전히 진척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에 기아자동차가 조립공장을 짓게 되었다. 연산(年産) 1000대 정도로 그다지 크지 않은 사업이었다. 칼리닌그라드의 한 호텔에서 조인식을 하니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다. 가보니 요란했다. 러시아 경제부처 장관들은 물론, 러시아 주재 외국 대사들도 여러 명 참석했다. TV방송사들도 많이 나왔다.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걸리는 칼리닌그라드로 내빈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비행기도 두 대나 준비했다. 김선홍 기아 회장도 “이렇게 호들갑을 떨 만한 사업이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했다. 공장 부지라는 곳을 가보았는데, 구소련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던 곳이라고 했다. 대지 면적이 수만 평인데, 그중 일부에 기아자동차 조립공장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부 러시아 인사들이 기아자동차 조립공장을 짓는다는 핑계로 사령부 부지를 불하(拂下)받기 위해 꾸민 짓이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눈이 어두운 꼴이라고 할까? 결국 그 땅은 몇몇 사람이 착복했고, 기아자동차 조립공장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러시아와의 경제협력과 관련해 가장 큰 현안은 한소수교 때 제공한 차관(借款)의 회수 문제였다. 한소수교를 하면서 우리 정부는 소련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고, 이 중 14억5000만 달러가량을 실제로 제공했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차관은 중단됐지만, 이자가 붙어서 22억 달러 정도로 상환해야 할 비용이 불어났다. 그런데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버렸다. 우리 정부는 러시아와 교섭, 이자는 탕감해 주고, 원금은 일부는 매년 얼마씩 현금으로 돌려받고, 나머지는 무기로 돌려받으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현금으로 갚는 것은 못 하겠다고 버텼다. 나는 정부에 “러시아에 제공한 차관은 처음부터 상업적 베이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만큼, 차라리 미해결 상태로 남겨놓아 대(對)러시아 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결국 ‘불곰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로부터 대형 헬기, 전차(戰車), 장갑차 등을 들여오는 걸로 타결을 보았다.
한소수교를 하면서 우리 정부는 소련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고, 이 중 14억5000만 달러가량을 실제로 제공했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차관은 중단됐지만, 이자가 붙어서 22억 달러 정도로 상환해야 할 비용이 불어났다. 그런데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버렸다. 러시아와의 경제협력과 관련해 가장 큰 현안은 한소수교 때 제공한 차관(借款)의 회수 문제였다.
이렇게 스피치 훈련이 되면 그 다음에 토론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책의 내용을 근거로 아이들은 저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아이의 생각을 읽어 낼 수가 있습니다. 글쓰기도 말하기와 같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해서 글로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때도 책의 내용을 저자의 사고구조대로 이해해서 글로 표현하는 다차원적 글쓰기(Multi-dimensional writing)가 되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이해한 내용을 글로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책의 내용을 구조적으로 표현하는 구조적 글쓰기(Structural writing)를 훈련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글의 구성이 탄탄해지고, 논리적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창의적 글쓰기(Creative writing)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빠져 있으면 그냥 글을 요약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뇌 아이들은 느낀 점은 잘 쓰지만 다차원적, 구조적 글쓰기가 잘 안 됩니다. 좌뇌를 잡아 주면서 글쓰기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반대로, 좌뇌 아이들은 글쓰기를 싫어합니다. 특히 느낀 점을 쓰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글이 화려하지도 않고, 길지도 않습니다. 그냥 짧게 요약하고 끝입니다. 좌뇌 아이에게는 반드시 지적 쾌감을 불러일으켜 지적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뇌가 자극되어 표현이 좋아지고 글도 좋아집니다. 이처럼 글쓰기는 제대로 된 글읽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교육의 포커스를 글읽기에 맞추어야 합니다. 특히 초등학교 때 해야 합니다. 우뇌가 강한 아이는 우뇌를 너무 많이 써서 좌뇌를 쓸 줄 모르고, 너무 좌뇌만 쓰는 아이는 우뇌를 발달시킬 수가 없습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가 이러한 교육의 적기입니다. 아직은 머리가 유연해서 다양한 뇌신경네트워크를 깔아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하면 아이들은 잘 따라옵니다. ‘저렇게 해 보자’ 해도 금방 따라옵니다. 강제로 깔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깔아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좌뇌 아이들은 글쓰기를 싫어합니다. 특히 느낀 점을 쓰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글이 화려하지도 않고, 길지도 않습니다. 그냥 짧게 요약하고 끝입니다. 좌뇌 아이에게는 반드시 지적 쾌감을 불러일으켜 지적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뇌가 자극되어 표현이 좋아지고 글도 좋아집니다.
굳은 결의를 하고 도전한 지난 자전거 순례(巡禮) 여정은 그야말로 대서사시(大敍事詩)라 할 만하다. 북미(北美) 인디애나 주(州)에서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공동체를 이룬 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17세기 유럽 기독교도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30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멈춘 듯한 환경 친화적 생활을 하는 암만파라, 즉 아미시(Amish·기독교 공동체)였다. 콜로라도,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주가 만나는 포코너스 주변 윈도록(Window Rock)에서 침략자인 백인들에게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변방으로 밀려난 원주민 나바호 인디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의 전통 가옥인 키바(Kiva)에 초대받아 함께 잠을 자고 교제하면서 그들의 슬픈 역사와 대지를 닮아 살아가는 아나사지 문화(Anasazi culture)의 인디언 삶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후 마리아치와 마야 문명이 인상적인 멕시코, 일제(日帝)시대 반(半)노예로 끌려가 유카탄에서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건넌 한인(韓人) 후예들이 있는 쿠바, 영화 ‘미션(Mission)’의 배경이 된 과라니(Guarani)족을 만난 파라과이, 전설적인 레게 가수 밥 말리(Bob Marley)에 열광하던 자메이카, 살아있는 화산의 경이로움을 눈앞에서 목격한 과테말라, 진흙쿠키를 먹는 아이들의 슬픈 눈동자가 그려지는 아이티,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 요리인 아사도(Asado)의 감격이 있는 아르헨티나,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지대에서 만난 초로(Cholo)족 인디오들과 교회 예배를 드린 볼리비아, 늘 환대를 아끼지 않던 콜롬비아 경찰들과 베네수엘라 소방관들, 백두산 쌍둥이처럼 분화구와 호수가 꼭 닮은 휴화산 킬로토아(Quilotoa)에 오른 에콰도르, 남미의 랜드마크인 페루 마추픽추와 브라질 이과수 폭포, 아마존 부족의 생경함이 뇌리에 각인된 수리남,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즐거움이 있는 가이아나 등 10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광야를 다니며 만난 친구들과 최고의 장면들은 내 마음속 찬란한 보석 같은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굳은 결의를 하고 도전한 지난 자전거 순례(巡禮) 여정은 그야말로 대서사시(大敍事詩)라 할 만하다. 북미(北美) 인디애나 주(州)에서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공동체를 이룬 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17세기 유럽 기독교도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30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멈춘 듯한 환경 친화적 생활을 하는 암만파라, 즉 아미시(Amish·기독교 공동체)였다.
모든 만남은 수평적 관계에서 조화 또는 상호 보완이라는 상승작용이 형성될 때 서로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누가? 왜? 이것을 버리겠는가?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이제는 이종(異種) 전문가들의 협업(協業)이 대세다. 전원마을 조성도 이종전문가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조경과 건축 모두를 위한 토목이 설계되어야 한다. 둘째, 건축에 지장이 없는 한계 내에서 단지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교목(喬木·줄기가 곧고 굵으며 높이가 8m를 넘는 나무. 소나무·향나무·감나무 등) 또는 소(小)교목의 식재(植栽)가 필요하다. 한 번 주택을 짓고 나면 주택 사이에 큰 나무를 심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토목설계가 조경과 건축을 아우르지 못하거나 조경에서 단지 전체의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자연과 어우러지는 진정한 의미의 전원주택은 들어서지 못한다. 그저 주택만 덩그러니 있는 곳에 잔디와 약간의 조경만 있는 일반주택만 만들어지게 된다. 전원주택의 규모에 맞는 나무를 심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지피(地皮·땅을 덮고 있는 잡초)식물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만 전원으로부터 혜택만 받으려는 삶의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전원을 찾아온 사람으로서 자격이 있다고 하겠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얼기설기 심어 놓은 나무들도 자연스럽게 자라서 이전보다는 나아지기는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10년 또는 20년 이상이 소요될 수 있다. 하지만 전원주택 설계단계부터 생각을 잘하면 바로 자연과 인간이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일부러 10~20년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이라는 시간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을 기쁨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조경은 시각과 촉각, 청각 등 온 감각을 자극하는 기쁨을 안겨 주는 중요한 매체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온전하게 얻고 또 즐길 수 있는 삶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원마을 조성도 이종전문가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조경과 건축 모두를 위한 토목이 설계되어야 한다. 둘째, 건축에 지장이 없는 한계 내에서 단지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교목(喬木·줄기가 곧고 굵으며 높이가 8m를 넘는 나무. 소나무·향나무·감나무 등) 또는 소(小)교목의 식재(植栽)가 필요하다.
종은 집이 있어도 제 집이 아니라 상전의 집이며 종은 땅이 있어도 제 땅이 아니라 상전의 땅이며 심지어 제 몸도 제 몸이 아니라 상전의 쓰는 기계며 제 자손도 제 자손이 아니라 상전이 부리는 우마니 상전은 누구냐 하면 종 부리는 사람의 존칭하는 이름이라. 상전은 무슨 재주가 많고 공이 많아서 상전이 되었는가.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제 조상부터 저 사람의 상전이 된 고로 나도 저 사람의 상전이 되었으며, 종은 무슨 죄가 많고 지혜가 없어 종이 되었는가.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제 조상 적부터 저 사람의 종이 된 고로 나도 저 사람의 종이 되었나니. 태고적 종법 나던 시대를 연구한즉, 혹 힘 많은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억제하며 부리기도 하며, 혹 권리 높은 사람이 권리 낮은 사람을 억제하며 부리기도 하며, 또 혹 그 나라 처음 일어날 때에 부락이 각각 나누어서 서로 범할 제 이 부락 사람이 저 부락 사람을 사로잡아 오면 종으로 부리며 저 부락 사람이 이 부락 사람을 사로잡아 오면 종으로 부리나니. 우리나라 신라 고구려 백제 시대 사기(史記-편집자)를 상고(相考-편집자)하건대 남의 부락 사람을 잡으면 의례히 공 있는 장수의 노비로 나누어 준 일이 많으니 이것이 다 어둔 시대의 열리지 못한 일이라. 족히 모범할 것이 못되거늘. 그 풍속이 오늘까지 남아서 종이라 하는 이름이 있는데 근래 종 있는 집을 보면 더욱 기막히는 일이 많토록(많토다-편집자). 어느 도에 흉년이나 들어 유리개걸하는 사람이 많으면 흉년이 아니 든 곳의 사람이 타도에 그 유리개걸하며 다니는 사람 중에 나이나 어리고 성품이나 순한 아이가 있으면 잡아 두고 종으로 부리고, 종 두지 못할 형세면 잡아 두었다가 종으로 팔아먹으며, 또 혹 부모가 조촐하여 미실미가한 아이가 있으면 잡아 부리기도 하며 팔기도 하고, 또 혹 어떤 고약한 놈이 제 속으로 난 자식을 돈에 욕심이 나서 팔아먹는 것을 사서 부리기도 하며,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기도 하며 또 혹 내 집 종을 남의 집에 팔기도 하며 남의 집 종을 사기도 하나니.
태고적 종법 나던 시대를 연구한즉, 혹 힘 많은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억제하며 부리기도 하며, 혹 권리 높은 사람이 권리 낮은 사람을 억제하며 부리기도 하며, 또 혹 그 나라 처음 일어날 때에 부락이 각각 나누어서 서로 범할 제 이 부락 사람이 저 부락 사람을 사로잡아 오면 종으로 부리며 저 부락 사람이 이 부락 사람을 사로잡아 오면 종으로 부리나니.
군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우리는 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직전까지도 고심했다. 오전 10시로 예정됐던 발표시각도 다시 한 시간 연기했다. 결국 발표문에는 지금 같으면 전혀 불필요할 문구들이 들어갔다. △검찰은 피의자들을 소환해 조사하면서 비로소 현역 군인 및 군무원들이 개입된 사실을 알게 됐으며 △이번 사건은 일부 군무원 및 군인의 개인적인 소행으로 군 전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사건을 군 전체와 연관지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문구가 단서조항처럼 덧붙여진 것이었다. 당장 이날 석간신문부터, 언론은 일제히 ‘군기밀 부동산 투기’라는 제목으로 이번 사건 및 수사 상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군사기밀을 둘러싼 부동산 투기에다 장군 승진 예정자를 포함한 영관급 장교와 고위 군무원들이 연루되고 그 규모도 수십억 원대에 달한 만큼 사건의 파장은 컸다. 정부, 특히 국방부가 발칵 뒤집혔다. 이상훈 국방장관은 투기 관련자들은 물론, 기밀이 누설된 경위를 조사해 지휘책임까지 묻겠다며 수사확대 방침을 밝혔다. 검찰로부터 사건 혐의자 명단을 통보받은 군 수사기관, 곧 보안사령부도 철저한 수사방침을 공표했다. 청와대에서는 국가기밀이 새나간다는 정황을 중시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를 통해 정부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보안감사를 시작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과 평민당은 국회 국방위원회를 통해 진상조사를 벌여야 한다며 거품을 물고 일어섰다. 우리 검찰이 아무리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군과의 충돌을 피해 가려 했다 해도, 사실 군으로서는 부글부글 속이 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검찰이 몰래 군인 및 군무원을 불러 조사한 것도 화날 일인데 더욱이 언론에 일방적으로 수사결과를 발표했으니 불만이 고조됐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군 수뇌부는 “어떻게 검찰에서 언론에 그런 일을 터뜨리면서 사전에 군에 한마디 언질조차 주지 않을 수가 있느냐”며 대단히 섭섭해 했다는 보도가 나기도 했다. 또 당시 실세로 통하던 한 장군은 검찰에 대해 공개적으로 “새파랗게 젊은 총장(김기춘 검찰총장을 지칭)이 겁이 없다”며 항의인지 협박인지 모를 발언을 쏟아놓기도 했다.
당장 이날 석간신문부터, 언론은 일제히 ‘군기밀 부동산 투기’라는 제목으로 이번 사건 및 수사 상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군사기밀을 둘러싼 부동산 투기에다 장군 승진 예정자를 포함한 영관급 장교와 고위 군무원들이 연루되고 그 규모도 수십억 원대에 달한 만큼 사건의 파장은 컸다. 정부, 특히 국방부가 발칵 뒤집혔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일본의 조원(造園) 방법이 도제 형식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면서 우리나라의 조경 형식인 것처럼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걸림돌 같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식 조경 방법이 어떻게 한국에 정착하게 됐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록 또한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한국식과 일본식을 뚜렷이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는즉 우리 조경의 정체성을 잃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일인들은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우리 터전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려는 시도를 했다. 그들은 조선 땅에 일본식 주택(지금의 적산가옥)을 짓고 정원을 조성해 살고 싶어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조경 전문가를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본토에서 조원 전문가를 불러들여 이 땅에서 일본풍 정원 가꾸기를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조원 기술자(오야)는 보조로 필요한 노동인력(시다)으로 조선인을 부렸고, 그렇게 일본식 조원 형식이 이 땅에 전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대표적인 수종이 원산지 일본으로 기록된 ‘가이쓰카 향나무(Juniperus chinensik Kaizuka)’이다. 이 나무는 둥글게 손질된 채로 오래된 학교의 교정에 또는 오래된 관공서의 조경 공간 중심에 어김없이 심어져 있다. 이 같은 조원 방식으로 정원을 가꾸어 오던 일본인들은 광복을 맞으면서 오야라 불렀던 조원 기술자와 함께 자신의 나라로 쫓겨 가고, 그들이 살았던 주택에서 보았던 정원을 기억하며 그것을 갖고 싶어했던 선망의 감정이 ‘시다’로 조경일을 했던 사람을 찾았고, 그들은 기술자 대접을 받으며 자신을 도와줄 조수를 고용했다고 본다. 그렇게 도제 형식으로 기술만 넘겨받다 보니 일본과 우리나라의 정신적 차이에 대한 것은 모른 채 왜 이 같은 조경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일본 조원 방식이 정원 조성의 정석인 양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경 관련 지식인들은 가까운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만을 번역해 국내에 보급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일본의 조원(造園) 방법이 도제 형식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면서 우리나라의 조경 형식인 것처럼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걸림돌 같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식 조경 방법이 어떻게 한국에 정착하게 됐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록 또한 남아 있지 않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 부정적인 생각만 늘어놓은 것 같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글에서 말하고자 했던 ‘천하에 병 없이 오래 사는 명약은 있다’라고 한 속내를 꺼내보기로 한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천 년 이전 상상 속의 세상으로 달려가야 한다. 농사란 개념 자체가 없던 원시시대였다. 사냥을 하고 자생하는 과일을 따 먹고 그리고 곡식도 알갱이만 채취해 날것을 그냥 씹어 먹었었다. 그야말로 원시자연과 더불어 생활했던 것이다. 약 4000년 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던 동양의학원전 《황제내경》에는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양생의 법을 행하였다. 음식이 육신의 정기를 길러주므로 바르게 섭취하면 100세를 훨씬 넘겨서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옛날 사서를 보면 수명이 100세는 보통이고 300세를 넘긴 제왕도 여럿 있었다. 하나같이 음식에 기인해 장수(長壽)한 사람들이다. 기독교의 성서에 나오는, 그들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수백 년을 생존했다는 기록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서양의학의 조종(祖宗) 히포크라테스는 “음식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은 의사도 고치지 못한다” “음식을 그대의 의사와 약으로 삼으라” 하는 말까지 남겼다. 오늘날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에 대해 경고하는 말 같기도 하다. 인류가 원시자연의 초목에서 얻은 음식으로 생활하던 그 시절에 병 없이 오래 살았던 까닭을 생각해 보면 이러하다. 곡식 중에서도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는 쌀을 예로 들어보자. 인류가 처음 발견할 당시의 벼는 어땠을까? 아마도 물기가 촉촉한 땅에 무리지어 무성하게 자란 벼가 익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고개를 숙인 채 탐스럽게 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온갖 잡초, 온갖 벌레들의 공격에서 살아남고 이기기 위해서 치열하고 강력한 생명력을 자생시킨 벼는 키와 몸통도 요즘의 벼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났을 것 같다. 누구의 돌봄도 없이 스스로 태어나 자란 만큼 키와 몸통이 억새만큼이나 크고 실했음 직하다. 열매도 웬만한 호박씨만 하지 않았을까?
인류가 원시자연의 초목에서 얻은 음식으로 생활하던 그 시절에 병 없이 오래 살았던 까닭을 생각해 보면 이러하다. 아마도 물기가 촉촉한 땅에 무리지어 무성하게 자란 벼가 익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고개를 숙인 채 탐스럽게 서 있었을 것이다. 누구의 돌봄도 없이 스스로 태어나 자란 만큼 키와 몸통이 억새만큼이나 크고 실했음 직하다.
당초 우리 수사팀의 기대 이상으로 폭력 피해 사례들이 줄줄이 확보됐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상급, 중견 연예인은 물론 신인과 무명 연예인들도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었다. 연예인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이런저런 폭력에 시달리고 있거나 시달린 경험을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해 유형은 7가지 정도로 분류됐다. ▲계약 여부에 관계없이 특정 나이트클럽에 유료 또는 무료 출연 강요 ▲특정 나이트클럽에 출연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명목으로 금품 갈취 ▲술값을 내놓으라거나 대신 술값을 내게 하는 방식의 금품 갈취 ▲싸구려나 저질 상품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강매 ▲나이트클럽과 기타 업소의 연예인 출연료 중 일정비율을 상습 갈취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업소에 출연하지 말 것을 강요 ▲미성년 연예인의 퇴폐적인 공연이나 유흥업소 강제 출연 등이었다. 이러한 폭력행사 및 금품갈취, 협박을 일삼은 자들은 비단 폭력배뿐만 아니었다. 조직폭력배는 물론 연예인들을 거느리고 방송이나 유흥업소 출연을 알선하는 프로덕션 관계자, 그리고 연예인을 직접 관리하는 매니저들도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이들 폭력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지없이 잔인한 보복이 뒤따르는 까닭에 연예인들은 이들을 가장 무서워했다. 언제 어디서든 폭력배들이 부르면 연예인들은 곧바로 달려가 술시중 등까지 마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같은 연예인 폭력 수사는 1990년 1월 22일 폭력배 10명을 구속하고 프로덕션 관계자 등 5명을 수배, 매니저 등 15명을 불구속입건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민생특수부의 ‘첫 작품’이었다. 언론 보도를 통해 겉으로 드러난 시간만 따지면, 처음 민생특수부가 발족하고 불과 20일 만의 개가였다. 그러나 사실 짧은 기간에 그런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이미 5~6개월 전부터 우리 검사들이 치열하게 이 사건에 매달린 덕분이었다. 당시 연예인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늘 폭력에 시달리던 그들로서는 속이 후련했을 것이다. 폭력 쪽 수사가 이처럼 매듭지어지면서 거의 동시에 검찰의 칼날은 이제 방송, PD들 쪽으로 휙 돌려졌다.
조직폭력배는 물론 연예인들을 거느리고 방송이나 유흥업소 출연을 알선하는 프로덕션 관계자, 그리고 연예인을 직접 관리하는 매니저들도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이들 폭력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지없이 잔인한 보복이 뒤따르는 까닭에 연예인들은 이들을 가장 무서워했다.
필자는 8년 동안 제주민군복합항 건설사업 진행과정에 관여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국군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군의 존재이유는 국민이다. 국군은 박수 받고 싶어하고, 국민은 박수쳐 주고 싶다. 국군에는 우리 아들딸들이 복무하고 있다. 미국 어느 공항에서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군인들을 본 시민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면서 한숨과 부러움이 인 적이 있다. 2015년 해군은 제주민군복합항 공사를 적극적으로 방해한 이들을 대상으로 구상권(求償權)을 청구했다. 당시 공사업체인 삼성건설은 공사지연으로 인한 손실금 중 일부인 127억원을 되돌려 받았다. 관계 법률에 따르면 이로 인한 예산의 추가 집행, 즉 국고 손실에 대해서는 구상권을 행사해야 한다. 해군은 일부 공사지연 원인은 시민단체 등의 방해활동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고 그 증거를 확보한 후, 121명에게 35억원가량을 청구하는 소장(訴狀)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구상권 청구는 항구가 다 지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갈등의 골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해군에 대한 반감이 더 생길 우려도 있었다. 제주민군복합항 완공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 구상권 청구를 한 것을 강정마을 주민들은 국가와 군대의 보복이라고 생각할 소지가 있었다. 강정마을 주민은 “이미 마을은 찬성자와 반대자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이 팬 상황에서 구상권 청구는 주민들이 다시 둘로 갈라지는 장벽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기지 건설에 찬성해 온 주민들은 그동안 ‘마을을 팔아먹은 사람들’이라고 비난 받아 왔다면서 “주홍글씨 달고 살아 온 시간이 너무나도 아팠다”고 말한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제주민군복합항 준공 몇 달 후 제주기지에 정박한 함상에서 열린 해군 해양력 심포지엄 기조연설에서 정호섭 해군참모총장 등에게 구상권 청구 철회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5월 10일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기간 중 구상권 철회를 언급했다. 이로써 이 문제는 국방부와 해군의 현안이 됐다.
2015년 해군은 제주민군복합항 공사를 적극적으로 방해한 이들을 대상으로 구상권(求償權)을 청구했다. 해군은 일부 공사지연 원인은 시민단체 등의 방해활동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고 그 증거를 확보한 후, 121명에게 35억원가량을 청구하는 소장(訴狀)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그런데 세계화에 관해 이해보다 오해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흔히 세계화는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우세하였으나 요즘은 나쁜 면도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세계화는 인류에게 득이 될 수도 있지만 손실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실상 세계화의 의미, 기제, 역사, 결과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세계화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무엇이 세계화를 추동하는가? 세계화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제부터 세계화는 시작되었고,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세계화의 결과는 무엇인가? 등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근거를 갖고 있을 때만이 세계화에 대한 오해를 줄이고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세계화는 흔히 경제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자본, 노동, 상품, 서비스 등이 국경을 넘어 교류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세계화는 자본주의를 모태로 기능 하면서 산업적 축적에서 금융적 축적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결과 국민경제가 사라지고 있으며, 국가의 수호자로서 기업도 국적이 없어진다는 주장처럼 세계화로 인하여 국민국가의 정책적 자유도가 약화된다는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세계화를 추동하는 요인은 이윤실현을 확대하려는 자본의 논리와 전 지구적 연결망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 정보통신, 교통운송의 혁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가 더욱 좁아지면서 지방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의 체계적 상호연결과 소통이 강화되면서 이른바 ‘세계지방화’(glocalization)와 ‘지방세계화’(locabalization) 현상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인류는 내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절대적 위치 및 시간 속에 갇혀 있기보다는 정보통신기기를 통해 ‘시공간적 압축’으로 표현되는 실시간 정보공유 네트워크를 유지할 수 있다. 이제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전 지구적 사안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요 행위자들은 서로 연결됨으로써 네트워크로서의 세계화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지구시민으로 국제정책 결정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제도를 통한 정치전술’을, 때로는 연대활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영향의 정치전술’을 행사하기도 한다.
세계가 더욱 좁아지면서 지방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의 체계적 상호연결과 소통이 강화되면서 이른바 ‘세계지방화’(glocalization)와 ‘지방세계화’(locabalization) 현상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인류는 내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절대적 위치 및 시간 속에 갇혀 있기보다는 정보통신기기를 통해 ‘시공간적 압축’으로 표현되는 실시간 정보공유 네트워크를 유지할 수 있다.
말로만 듣던 아이오와 코커스 현장은 참 어수룩했다. 2월 1일 밤 찾은 디모인의 몬로 초등학교에는 공화당과 민주당원들이 줄을 서서 한 시간째 코커스 장소로 들어가고 있었다. 체육관, 카페테리아, 도서실, 강의실 등 4곳에서 코커스가 동시에 열렸다. 공화당이 2개 지역구, 민주당이 2개 지역구. 입구에 신분 확인을 하는 절차가 있었지만, 아무나 코커스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현장에서 당원으로 등록해 투표할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난생처음 투표를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 또한 많이 보였다. 샌더스 열풍이 이유였다. 한 대학생은 “코커스에는 처음 나온다”며 “샌더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나왔다”고 즉석 입당원서를 썼다. 주변에는 친구 여러 명이 똑같이 당원 등록을 하고 있었다. 코커스 방식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확연히 달랐다. 같은 점은 특별히 정해진 규칙이나 제약이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 공화당은 모인 당원 수를 확인하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찬조연설을 할 사람이 있으면 나선다. 없으면 그만이다. 후보별로 제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숫자도 사실상 제한이 없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한쪽 사람이 나서서 일방적 주장을 하는 경우는 없다. 몬로 초등학교 도서실에서 열린 공화당 코커스에서는 트럼프 지지자가 먼저 나섰다. 50대의 여성은 “기존 정치가 우리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새로운 인물로 새롭게 나라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곧바로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인 벤 카슨 지지자가 나섰다. 개인적으로 그의 자서전을 보고 반했다는 이 여성은 한참 동안 자기가 생각하는 카슨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본격적으로 지지연설을 했다. 시간이 10여 분 이상 지났지만, 아무도 제지하지는 않았다. 10명 가까운 후보들이 나선 탓에 지지연설은 계속 이어졌다. 이후 절차는 간단했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을 적어서 반장 선거하듯 내면 된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후보 이름 옆에 지지자의 숫자가 적히고, 그걸 종합해 본부로 보내면 득표율이 합산된다. 미국 대통령 선거 본선은 한 주에서 1%라도 이기면 주 전체 대통령선거인단을 독식하는 ‘위너 테이크스 올(Winner takes all)’ 시스템인데, 후보 경선 단계에서는 대부분 득표비례로 대의원을 정한다.
말로만 듣던 아이오와 코커스 현장은 참 어수룩했다. 입구에 신분 확인을 하는 절차가 있었지만, 아무나 코커스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현장에서 당원으로 등록해 투표할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난생처음 투표를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 또한 많이 보였다. 한 대학생은 “코커스에는 처음 나온다”며 “샌더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나왔다”고 즉석 입당원서를 썼다.
간이 약하면 짠맛·신맛으로 돕고, 강하면 쓴맛으로 완화시키면서 매운맛으로 억제하고, 심장이 약하면 신맛·쓴맛으로 돕고, 강하면 단맛으로 완화시키고 짠맛으로 억제하고, 비장이 약하면 쓴맛·단맛으로 돕고, 강하면 매운맛으로 완화시키고 신맛으로 억제하고, 폐가 약하면 단맛·매운맛으로 돕고, 강하면 짠맛으로 완화시키고 단맛으로 억제하면 오장육부를 평등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란 게 나쁜 것일수록 여간 고약하지가 않다. 아무리 오장육부가 평등해도 세상사가 스트레스를 주기 마련이다. 특히 스트레스는 억제하려 들면 들수록 반기를 들고 더 심하게 발광하니 다스리기가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 분노가 솟구치면 참으려고 애쓰지 말고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고 긍정하면 된다. 그리고 분노를 주관하는 간을 마음으로 관리하거나 분노의 대상을 측은하게 생각하면 저절로 성질이 가라앉는다. 또 하나의 방법은 폐가 간의 에너지를 억제하므로 매운맛을 먹으면 분노가 일시적으로 잠잠해진다. 이와 같이 오장을 다스리는 데 비장이 나빠 걱정이 많으면 긍정하면서 근심의 대상을 덕을 베푸는 심정으로 생각하며 신맛을 먹으면 도움이 되고, 폐가 나빠 우울하면 기쁜 것만 생각하면서 쓴맛을 먹고, 신장이 나빠 공포심이 많으면 공포의 대상을 걱정하고 단맛을 먹고, 심장이 나빠 슬픔이 북받치면 무서운 것을 생각하면서 짠맛을 먹으면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스리면 자연히 마음이 고요해져서 병에서 해방될 수 있고 생명 에너지가 넘쳐서 백 살을 넘기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음식이다. 천년 묵은 산삼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나 음식만 끊지 않으면 절대로 숨이 멎지 않는다. 특히 오곡이 그러하다. 오곡만 끊지 않으면 생명은 존속된다. 그 다음은 반찬이다. 반찬은 산야초목이니 약탕기에 넣으면 한약이 되고, 조리하면 반찬이 된다. 따라서 음식을 바르게 섭취하는 것이야 말로 백세를 넘기는 최고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스리면 자연히 마음이 고요해져서 병에서 해방될 수 있고 생명 에너지가 넘쳐서 백 살을 넘기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천년 묵은 산삼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나 음식만 끊지 않으면 절대로 숨이 멎지 않는다. 특히 오곡이 그러하다. 오곡만 끊지 않으면 생명은 존속된다.
내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에 있는 동안 웃기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 날 일정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4강(미·중·일·러) 원수(元首)하고 통화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4강 대사 면담이었다. 미국 대통령, 일본 총리, 중국 주석 등 4강 원수들과 통화하는 건 당연했다. 그쪽 원수들도 통화를 원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있을 수 있었다. 4강 대사 면담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프랑스에서 대통령 당선인이 당선된 다음 날 외국 대사를 만나겠는가? 안 만난다. 그런데 우리는 4강 대사와 면담을 했다. 왜 했겠는가? 인수위에 외교안보팀이 있었는데, 여기 소속된 외교관 출신들이 거의 귀신에 가깝다. ‘권력자를 어떻게 하면 자기 수중에 넣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누군가 꾀를 내서 당선인을 설득해 4강 대사 면담을 하라고 한 거다. 당선인이 최고로 인기가 좋은 그날, 국민들과 만날 시간을 빼앗아 붙잡고 있겠다는 것이다. 그날 당선인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는 사람이 실세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이 사람들이 곧이어 미국 방문 계획을 짰다. 취임 직후인 3월 중 방미(訪美)를 추진한 것이다. 그때는 정말 ‘위험한 어젠다’가 있던 시기다. 만약 그대로 방미를 했으면 ‘광우병 사태’로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서 당시 내가 “이건 위험하다. 미국산 소고기와 관련한 한미(韓美)회담이 잘못되면 총선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총선 압승으로 “개헌선까지 확보할 수 있는데, 총선 망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했다. 그런데도 당시 이명박 당선인은 내게 “외교·안보도 잘 모르면서 왜 떠드냐”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외교안보팀, 기획팀과 “난상토론을 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방미가 총선 뒤로 연기됐다. 이처럼 인수위라는 곳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당선인을 갖고 노는 사람이 많고, 당선인은 권력에 미리 취해서 엉뚱한 일을 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당선인이 실제로는 최고 권력자이면서도, 그를 받쳐주는 제대로 된 참모가 인수위에 없으면 ‘권력의 진공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수위라는 곳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당선인을 갖고 노는 사람이 많고, 당선인은 권력에 미리 취해서 엉뚱한 일을 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궈원구이는 2017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최고 지도층의 추문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미국 화교사회와 양안삼지(兩岸三地·홍콩, 타이완, 마카오)의 중국어를 사용하는 트위터 유저들 사이에 궈원구이의 폭로가 폭넓게 유포되자, 중국 정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2017년 4월 18일 인터폴을 통해 미국에 머물고 있는 궈원구이를 지명수배하고 미국 정부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지명수배 사유는 중국 내 고위층의 비리에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루캉(陡慷) 중국외교부 대변인이 이 사실을 정례회견에서 발표했다. 중국의 국가안전부 요원들은 5월 하순에 뉴욕에 있는 궈원구이의 자택을 방문, “중국 정부에 대한 과격한 행위를 접고 귀국하라”면서 몇 시간 동안 협상을 벌였다. 국가안전부 서열 3위로 알려져 있는 류옌핑(劉彦平)이 궈원구이의 중국 내 재산동결 해제와 가족의 안전을 제안하며 설득했다. 궈원구이는 이를 거절했다. 궈원구이를 설득하러 미국에 온 국가안전부 요원들의 행적은 미 FBI가 지켜보고 있었다. 뉴욕 시내의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FBI 요원들은 4명의 중국 요원을 불시 검문, 직무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문화사무관계 외교관이라고 둘러댔다가 나중에 첩보원임을 인정했다. FBI는 이들의 출국을 요구했다. 이들 가운데 류옌핑 등 2명은 24시간 내로 출국하라는 FBI의 지시를 무시하고 다시 궈원구이의 자택을 찾았다. 뉴욕 검찰은 이들을 여권법 위반과 공갈 혐의로 기소할 준비를 했다. FBI 요원들은 중국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출국할 예정인 뉴욕 JFK 공항 브리지에서 이들을 체포할 태세를 갖췄다. 당시 미국 법무부는 중국 요원들의 행동은 외교나 영사 업무가 아닌 개인에 대한 범죄로 간주, 강경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미 국무부는 중국이 베이징 주재 미 외교관들에게 보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만류했다. 결국 류옌핑 일행은 JFK 공항에서 휴대폰을 압수당하고 ‘에어차이나’에 올라야 했다. 이 같은 첩보활극은 5개월이 경과한 10월 22일 《월스트리트저널》에 자세히 보도됐다.
궈원구이는 2017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최고 지도층의 추문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미국 화교사회와 양안삼지(兩岸三地·홍콩, 타이완, 마카오)의 중국어를 사용하는 트위터 유저들 사이에 궈원구이의 폭로가 폭넓게 유포되자, 중국 정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미국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활동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의 활동이 기념관 및 도서관, 그리고 대학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대학과 연계하여 전직 대통령을 기념하는 기념관 및 도서관, 그리고 대학교내 연구소 또는 대학원의 설립, 즉 ‘대통령 스쿨’을 통해 퇴임 후 사회활동을 하면서 미래의 공공지도자 육성에 노력하였다. 우선 초대 워싱턴(Washington) 대통령의 이름을 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학교가 1821년 수도인 워싱턴에 설립되었다. 후버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19년 많은 돈을 자신이 졸업한 스탠퍼드(Stanford) 대학교에 기부하여 후버 연구소를 설립하고 퇴임 후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프린스턴(Princeton) 대학교는 이 대학의 졸업생이자 총장을 지낸 윌슨(Wilson) 대통령을 기념하고자 1948년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스쿨인 윌슨 정책대학원을 설립하였다. 하버드(Harvard) 대학교는 졸업생인 케네디(Kennedy)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1966년 케네디 행정대학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최근 전직 대통령의 예를 보면, 존슨(Johnson) 대통령은 고향인 텍사스(Texas)주의 텍사스(TU-Austin) 대학교에 1970년 자신의 기념도서관과 대통령 스쿨인 존슨 정책대학원을 함께 설립하였다. 닉슨(Nixon) 대통령도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요바 린다(Yorba Linda)에 기념도서관을 건립했다. 포드(Ford) 대통령은 자기 모교인 미시간(MU-Ann Arbor) 대학교에 도서관을 건립했으며 1999년 포드 정책대학원을 설립하였다. 카터(Carter) 대통령도 1982년 자기 고향인 조지아(Georgia)주의 에모리(Emory) 대학교에 기념도서관 겸 연구소를 건립했다. 레이건(Reagan) 대통령 역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근교 시미 밸리(Simi Valley)에 기념도서관과 연구소를 설립했다. 부시(George H. Bush) 대통령은 1995년 그의 정치적 고향인 텍사스주의 텍사스 A&M 대학교에 기념도서관과 부시 정책대학원을 설립하였다. 클린턴(Clinton) 대통령도 2004년 고향이자 그가 교수로 재직했던 아칸사(Arkansas) 대학교에 그의 기념도서관과 클린턴 공공서비스대학원을 설립하였다. 끝으로 지난 2009년 퇴임한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도 고향인 텍사스 댈러스에 있는 남감리교대(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 기념도서관 및 정책연구소를 설립하고 있으며 오는 2013년 개관할 예정이다.
미국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활동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의 활동이 기념관 및 도서관, 그리고 대학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대학과 연계하여 전직 대통령을 기념하는 기념관 및 도서관, 그리고 대학교내 연구소 또는 대학원의 설립, 즉 ‘대통령 스쿨’을 통해 퇴임 후 사회활동을 하면서 미래의 공공지도자 육성에 노력하였다.
국가안보 차원에서 미소가 취급되던 이 시기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미소는 ‘센다이미소(仙台味噌)’다. 센다이번(仙台藩)의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1567~1636년)는 센다이를 전국 최강 번의 하나로 이끈 명장(名將)이다. 그는 번 내의 운하를 정비하고 농지를 개척하는 한편, 조카마치(城下町·성 주위의 상업지구)에 전국 각지에서 능력 있는 상인, 기술자, 학자를 불러 모아 거주시킴으로써 경제와 문화의 융성을 도모한다. 부국강병책을 가장 성공적으로 추진한 다이묘 중의 하나인데, 그의 일화 중에서 센다이미소와 관련된 일화가 유명하다. 미소의 중요성에 일찍이 눈뜬 마사무네는 품질, 영양, 보관성이 우수한 미소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마사무네의 목표는 성이 포위되어도 1~2년을 외부의 보급 없이 성내에서 자급자족하며 농성(籠城)하는 방어력의 획득이었다. 마사무네는 이를 위해 조슈마카베군(常州真壁郡·현재의 이바라키현) 출신의 미소 제조 쇼쿠닌(職人·전문기술자) 마카베야이치베(真壁屋市兵衛)를 연공(年貢) 현미 백석(百石)에 초빙하여 미소 제조를 의뢰한다. 작은 번의 오모테다카(表高·영지의 표준 미곡 산출량)가 1만 석부터 시작하는 점을 감안할 때, 100석의 연공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마사무네는 마카베야이치베의 스카우트와 함께 성(城) 아래에 ‘오엔소구라(御塩噌藏)’를 건립하도록 지시한다. 오엔소구라는 미소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방(工房)으로 일본 최초의 공업적 미소 생산시설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마카베야이치베는 고메미소(米味噌) 양조법에 능한 기술자였다. 쌀과 콩을 함께 사용하는 고메미소는 콩의 단백질과 쌀의 탄수화물을 동시에 섭취할 수 있어 전투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마카베야이치베는 쌀누룩을 활용해 염도를 높이면서도 발효가 진행되는 양조법(釀造法)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는 미소의 보존기간을 크게 연장시켰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전략물자를 개발하고 대량으로 생산한 것이다(일본의 미소는 한국의 된장과 달리 자연발효 메주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배양된 누룩균을 사용하여 발효시킨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된장 제조 공정을 술과 마찬가지로 ‘釀造’라고 표기한다).
센다이번(仙台藩)의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1567~1636년)는 센다이를 전국 최강 번의 하나로 이끈 명장(名將)이다. 그는 번 내의 운하를 정비하고 농지를 개척하는 한편, 조카마치(城下町·성 주위의 상업지구)에 전국 각지에서 능력 있는 상인, 기술자, 학자를 불러 모아 거주시킴으로써 경제와 문화의 융성을 도모한다.
이렇게 성공적인 군축조약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에 대해 알아야 한다. 1977년 초 소련이 SS-20 세이버라고 불리는 중거리 미사일을 개발해서 이를 유럽의 소련 위성국 영토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SS-20 미사일은 기동과 은닉이 가능한 중거리 미사일로 한 발의 파괴력이 1만5000톤, 즉 히로시마 급에 이르는 핵폭탄을 여러 발 장착할 수 있는 신형 무기였다. 유럽에서의 핵전략 균형을 일거에 소련에 유리하게 만드는 전략적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SS-20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4700~5000km였기 때문에 소련 본토에서도 유럽 전역을 공격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SS-20의 사정거리는 미국과 소련이 이미 약속했던 SALT-II. 즉 전략무기제한 2차 회의에서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다. SALT-II에서 제한했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최소 사정거리가 5500km를 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기왕에 배치되었던 비교적 열등한 미사일들인 SS-4, SS-5를 SS-20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앞의 두 미사일들은 방어적 성격이 강했는 데 비해 SS-20은 공격적인 미사일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카터는 미국이 보유한 해상 전략무기(대륙간)와 핵폭탄을 장착한 항공기로 소련의 공격 위협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1977년 서독 수상 헬무트 슈미트는 NATO 국가들은 SS-20가 야기하는 위협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을 향한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공격을 가장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방안은 유럽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중거리 미사일일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미국이 중거리 미사일을 유럽 지역에 배치하는 것이 차선(次善)의 억제력이 될 것이다. SS-20 미사일이 유럽 국가들을 향해 발사될 경우, 미국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서 미국 본토에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소련을 향해 발사해야만 하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소련이 유럽을 향해 칼을 휘둘렀는데 미국이 소련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1977년 초 소련이 SS-20 세이버라고 불리는 중거리 미사일을 개발해서 이를 유럽의 소련 위성국 영토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SS-20 미사일은 기동과 은닉이 가능한 중거리 미사일로 한 발의 파괴력이 1만5000톤, 즉 히로시마 급에 이르는 핵폭탄을 여러 발 장착할 수 있는 신형 무기였다. SS-20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4700~5000km였기 때문에 소련 본토에서도 유럽 전역을 공격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앞의 세 코스가 연회 전의 간식이었다면 네 번째 코스는 전채요리로 이름 역시 전채대조각(前菜大彫刻)이다. 이름에 조각이 들어간 것은 매 선에 이룡희주(二龍戱珠·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놀다), 백옥공작(白玉孔雀·무로 만들어 백옥처럼 하얀색의 공작), 붕정만리(鵬程萬里·만리를 날아가는 대붕) 등과 같은 화려한 이름의 조각을 배경으로 각각 8가지의 찬 음식을 차리기 때문이다. 음식으로는 소금물에 절인 사슴고기인 염수녹육(鹽水鹿肉), 새우를 나비 모양으로 만들어 요리한 호접하(蝴蝶蝦) 등 특별한 것도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오향우육(五香牛肉) 같은 것들도 있다. 다섯 번째는 품과어연탕(品鍋御宴湯)으로, 이름 그대로 뜨거운 탕 요리다. 매 선에 오르는 요리는 악어발탕인 관민악어장(罐燜鰐魚掌), 콩 싹과 사슴꼬리를 재료로 한 두묘녹미탕(豆苗鹿尾湯), 약재인 천마와 거북을 곤 천마금구(天麻金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불도장(佛跳墻), 여덟 가지 진기한 재료로 만든 팔진일품과(八珍一品鍋), 악어의 혀와 발을 뭉근하게 끓인 악어설회장(鰐魚舌燴掌) 등이다. 이어지는 어연대채(御宴大菜)는 주요리다. 이 여섯 번째 코스에는 모두 5차례 음식이 오르는데 그중 4차례는 각각 4개의 요리로 구성되어 있고, 한 차례는 구운 고기 2종이 오른다. 이때 사용되는 재료야말로 산해진미이고 기이한 재료들이다. —주요리에 사용하는 특별한 재료를 든다면. “잘 알려진 상어지느러미, 바다제비집(燕窩·연와), 원숭이머리버섯, 동충하초 등 여러 진기한 재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재료와 양념 하나하나 모두를 최상품으로만 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자인 황제를 위한 음식이었기에 당연히 그러해야 했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양념도 모두 천연재료를 쓰는데, 이를테면 단맛 하나도 옥수수에서 추출한 단맛과 호박에서 추출한 단맛을 제각각 다른 요리에 씁니다. 호박과 어울리는 음식에 옥수수의 단맛을 쓰면 맛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이롭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 때문이죠.”
이어지는 어연대채(御宴大菜)는 주요리다. 이때 사용되는 재료야말로 산해진미이고 기이한 재료들이다. 잘 알려진 상어지느러미, 바다제비집(燕窩·연와), 원숭이머리버섯, 동충하초 등 여러 진기한 재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재료와 양념 하나하나 모두를 최상품으로만 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김정은이 좋아하는 용어이자, 결국은 남한의 미군 철수를 노리는 용어다.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해주면, 대신 (핵 위협 등) 장난은 안 친다는 이야기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이 핵을 들여올 수 있으니까) 미군 나가라. 그러면 한반도 비핵화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미국 하원의 펠로시 의장은 ‘북한이 원하는 것은 한반도 무장 해제’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대북 제재를 푸는 데만 마음이 가 있는 모습이다. 핵을 없애려는 일에 소홀하니까 대한민국 안보, 즉 국가 보위가 되겠나.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북핵 제재 해제를 이야기하고 다니니까, 외국 사람들은 “그게 아닌데” 하는 것이다. 정말 “나라의 국격이 무너지는 것 같아 창피하고 억울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둘째는 경제 문제다. 기업은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되면 투자를 한다. 기업은 이윤을 남기기 위한 조직 아닌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하면 투자할 것이고, 투자하면 일자리가 느는 것이다. 일자리가 늘면 고용이 늘 것이고, 고용이 늘어나니 많이 고용된 사람들의 소득이 늘고, 또 이 소득으로 물건을 사게 되므로 소비가 늘어난다. 소비가 늘면 또 생산이 늘게 마련이고, 그러면 또 고용이 늘어난다. 이것이 시장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소득주도’라고 한다. 말은 그럴듯하나 결국은 ‘공무원 늘리는 것’과 ‘국가 세금으로 메꿔주는 것’이다. 공무원을 늘리면 규제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공무원이 늘어나면 책상에 앉아 밥값이라도 할 요량으로 ‘뭐로 문제 삼아볼까?’ 하는 연구를 하게 되어 있다. 내가 총리 할 때 대통령 주최로 규제개혁 논의를 했다. 내 차례에 나는 “여기 논의 내용 좋다. 근데 실제로는 현장의 말단 공무원, 국민들의 민원 받는 공무원들의 의사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아무리 규제 푼다고 해도, 일선 공무원이 ‘그거 어려운데요. 알아봐야 하는데요’ 하면 민원인은 집에 돌아가 애를 태운다. 그다음에 봉투를 주든 굽실대든, 아는 사람 동원해 ‘빽’을 쓰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김정은이 좋아하는 용어이자, 결국은 남한의 미군 철수를 노리는 용어다. 한반도 비핵화는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이 핵을 들여올 수 있으니까) 미군 나가라. 이에 대해 미국 하원의 펠로시 의장은 ‘북한이 원하는 것은 한반도 무장 해제’라고 했다.
기차에서 뛰어내렸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할머니를 구해 준 사람이 그녀를 어느 조선인에게 데려갔다. 거기서 ‘함바집’(건설 현장에 딸려 있는 식당)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함바집 주인 또한 조선인이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그와 함께 살았다. 18살 연상의 그를 할머니는 때론 아버지처럼 여기며 살아온 듯하다. 두 사람은 식은 안올렸지만 실질적인 부부처럼 살았다. 할머니는 내내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어머니가 자신을 강제로 결혼시키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35년을 부부처럼 살았지만, 육체관계는 없었다고 한다. 양 대표는 “아마 할머니는 성관계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할아버지(남편)와는 그런 관계를 맺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과거를 일찌감치부터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스스로 들려줬단다. 주섬주섬 지난 세월을 들려주는 여자 옆에서 남자는 이를 죽이느라 불 위에서 옷을 털고 있었단다. 남자는 울면서 옷을 털었고 여자는 이가 죽는 걸 신기해하며 응시했다. 두 사람은 할머니를 버린 일본 군인의 집에도 찾아갔다고 한다. 낯선 나라의 낯선 집의 위치를 할머니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군인은 그곳에 없었다. 여자를 강간하고 죽인 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형무소에 있었단다. 1981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다시 혼자가 됐다.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러 동네 관청(동사무소)을 찾았다. 여기에서 할머니와 직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급기야 경찰까지 왔단다. 할머니는 경찰의 권총을 뽑아들고 지역 의원에게 총을 겨눴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말. “나는 중국까지 가서 국가를 위해 싸운 여자야!”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전쟁 통에 여자가 중국까지 가서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할머니가 위안부였다는 게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였다. 동사무소 쪽에서는 민단에도 연락했다. 위안부 네트워크에 할머니의 존재를 제보한 이가 바로 그때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간 민단 관계자였다.
기차에서 뛰어내렸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할머니를 구해 준 사람이 그녀를 어느 조선인에게 데려갔다. 거기서 ‘함바집’(건설 현장에 딸려 있는 식당)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남효온은 특히 종친인 이심원(李深源)과 깊은 교결을 맺고 당을 맺어 소학에 입각한 정치행동에 나섰다. 성종 9년 4월 유생이던 남효온은 내수사(內需司) 혁파를 비롯한 8가지 정치문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소를 올리는데 그중 핵심은 내수사 혁파였다. 그 전날에는 이심원도 비슷한 내용의 소를 올렸다. 내수사란 임금의 사(私)금고로 이는 주희 때부터 일관된 비판 대상이었다. 임금은 천하가 집이니 사사로이 금고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자학적 정치강령의 핵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미 조정 안에는 소학당의 무리가 보여주는 행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동부승지 이경동(李瓊同)은 이렇게 말했다. “남효온은 주계부정 이심원이 천거한 서생 강응정의 무리인데 효온의 무리가 일찍이 성균관에 있을 때 스스로 서로 추존(推尊)하여 강응정을 부자(夫子·극존칭)라고 일컫고 박연을 안연(淵·공자의 수제자)이라고 일컫기까지 하며 그 나머지를 차례로 지목하여 괴이한 행동을 빚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이가 말했던 “헛되이 형식만을 앞세우는 면”이란 바로 이것이다. 특이하게도 서로 헛되이 높이는 행태는 《소학》 숭배자들에게는 일관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오늘날의 운동권들이 서로를 헛되이 높이는 행태의 뿌리는 어쩌면 이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연산군일기》 4년(1498년) 8월16일자에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한창인 가운데 유자광(柳子光)의 남효온・김굉필이 함께 조직했다는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대한 비밀보고가 실려 있다. 즉 유자광은 왕당파(王黨派)로서 반(反)왕당파인 사림과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유자광의 이런 입장은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때까지 일관된 입장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유자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의 인격적 문제와는 별개로 주자학 무리에 반대한 자로서 받아야 했던 비판의 결과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주자학 비판과 더불어 유자광의 실제 모습에 대한 입체적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말이다. 그의 보고를 들어보자.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유자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의 인격적 문제와는 별개로 주자학 무리에 반대한 자로서 받아야 했던 비판의 결과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주자학 비판과 더불어 유자광의 실제 모습에 대한 입체적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말이다.
DJP연대(連帶)를 통해 대통령이 된 DJ는 JP를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JP가 DJ와 연대하는 바람에 대선에서 패했다고 생각한 한나라당은 JP를 비토하고 나섰다. 사실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투표 전 여야 원내총무 회담 때는 이상득(李相得, 제13~18대 국회의원 역임) 원내총무도 총리 인준에 부정적이 아니었다. 나는 어차피 JP가 국무총리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거기에 반대하는 것은 못 먹는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선 패배의 한(恨)을 품은 한나라당은 결국 JP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기로 했다. 나는 이상득 원내총무에게 “여당과 타협을 해 놓고서 이렇게 뒤집으면 의회정치가 안 된다. 이 총무는 원내총무 이전에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1998년 3월 2일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투표가 있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기표소에 들어가지 않거나 기표소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사실상의 공개투표였다.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들은 내게 몰려와 “저걸 두고만 볼 거냐?”고 아우성을 쳤다. 나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북한에서나 하는 공개투표를 하고 있는 거냐?”고 야단을 쳤다. 하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국회의장으로서 공개투표를 두고 볼 수는 없다”면서 투표를 중단시켰다. 이후 JP는 그해 8월까지 ‘국무총리 서리(署理)’ 딱지를 떼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경색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나는 여야 원내총무 회담을 여러 번 주선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박상천 원내총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이정무(李廷武, 제13,15대 국회의원, 건설교통부 장관 역임) 원내총무는 원만한 사람이었다. 이상득 한나라당 원내총무도 모난 사람은 아니었다. 꼬인 정국이 풀릴 듯도 했다. 그런데 회의 도중에 이상득 총무에게 전화가 걸려 오곤 했다. 나가서 전화통화를 하고 돌아오면 이 총무의 입장이 바뀌었다. 박상천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는 화가 나서 내게 “의장님, 차라리 이회창 총재 보고 이리 나오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상득 원내총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1998년 3월 2일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투표가 있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기표소에 들어가지 않거나 기표소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사실상의 공개투표였다. 나는 이상득 원내총무에게 “여당과 타협을 해 놓고서 이렇게 뒤집으면 의회정치가 안 된다. 이 총무는 원내총무 이전에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프랑스 어느 지방에서는 이상하게도 부모들 사이에서 자던 아이들이 질식사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단다. “제가 자다가 그만 뒤척여서 그만 깔아 버렸지 뭡니까, 흐흐흑.” 대충 이런 답변을 부모들이 한다는 거다. 이런 소리를 어쩌다 한둘이 하면 모를까, 너무 많이 자주 빈번하게 집단적으로 말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부모들의 이런 핑계(?)에 교회지도자들은 ‘어린 아이를 부모 사이에서 재우지 말라’는 칙령을 내리기까지 한다. 대체 아이들은 왜 죽었을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누가 죽였을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고 그래서 확증할 수도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로버트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꽤나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17세기 프랑스 노르망디의 크륄레에서는 1000명의 아기 중 236명이 돌 전에 사망했고, 18세기 프랑스 사람들의 약 45%는 열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고 한다. 사망 이유야 여럿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먹을 것 부족이었다. 가난, 기근, 흉년. 이런 것들이 근본 원인이었다. 아이들이 굶어 죽었냐고? 아니 그런 말이 아니다. 미치도록 삐져나오는 뱃살을 빼기에 광분한 요즘 시대는 죽어도 이해 못할 말이지만, 그리 멀지 않은 시절 우리나라만 해도 ‘보릿고개’ 같은 황당한 말이 정말 있었고, ‘초근목피(草根木皮)’란 말이 북한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던 때가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다는 개념을 거의 잊어버린 현대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실이, 바로 ‘새로 태어난 아이란 같이 숟가락을 들고 함께 먹을 것을 노리는 경쟁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경쟁자가 공교롭게도 매우 약하고 어설프며 쉽게 제거(?) 가능하다는 이점(利點)을 노려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슬프지만 엄연히 상존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이를 추운 곳에 내놓아서 얼어 죽게 하거나, 구걸 보내놓고 부모들끼리 도망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마을 공동의 보모에게 아이를 맡기면 꽤 많이 죽어 나간다는 것을 알지만 그걸 심각하게 따지지도, 근절시키지도 않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17세기 프랑스 노르망디의 크륄레에서는 1000명의 아기 중 236명이 돌 전에 사망했고, 18세기 프랑스 사람들의 약 45%는 열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고 한다. 가난, 기근, 흉년. 사망 이유야 여럿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먹을 것 부족이었다. 이런 것들이 근본 원인이었다.
이제 어수선한 도시 분위기를 조금 비켜가 보자. 차분한 15세기 건물 아바텔리스 궁(Palazzo Abatellis)에 시칠리아 주립미술관(Galleria Regionale della Sicilia)이 있다. 중세부터 바로크까지 망라한 소장(所藏)이지만 알려진 르네상스 명품 몇 개가 역시 인상적이다. 초입의 대형 벽화 〈죽음의 승리(Trionfo del Morte)〉가 시원 섬뜩하고,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1430~1479)의 〈수태고지 받은 성처녀(Virgine Annunciata)〉는 성처녀 얼굴 묘사에 전에 못 보던 섬세함과 친근함이 마음에 와닿는다. 인물화를 외관묘사에서 내면표현으로 끌어올린 시칠리아 출신으로는 희귀한 르네상스 화가다. 그림을 좋아한다면 좀 떨어져 있지만 19세기 이후 이탈리아의 좋은 그림들이 많은 현대미술관(Galleria d’Arte Moderna di Pallermo)도 볼 만하다. 시칠리아 출신 미술가 위주의 지방 미술관인데도 컬렉션의 폭과 깊이 그리고 수준이 대단하다. 이탈리아의 현대미술에서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와 미래주의(futurismo)가 그저 일부임을 보여준다. 뿌리깊은 도시에 샘이 깊은 소장이다. 몬레알레(Monreale)는 팔레르모에 머무는 동안 반드시 들러야 할 교외 마을이다. 팔레르모의 ‘황금분지’를 굽어보는 경치도 그만이지만 두오모가 필수다.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적통 굴리엘모(Guglielmo·영어로 William) 2세가 온 정성을 기울인 역사다. 가까운 풀리아는 물론 멀리 토스카나에서까지 명장(名匠)들을 초빙해 와 짓고 꾸몄다. 피사(Pisa)의 사탑을 만든 당대의 건축가 본나노(Bonnano da Pisa)도 불려와 청동문짝을 만들었다. 두오모 내부의 벽면을 모두 덮다시피 한 모자이크 그림들과 부속 키오스트로의 아치와 조경은 다시 없을 걸작이다. 팔레르모의 노르만 궁이나 이곳 몬레알레 두오모의 모자이크 그림은 모자이크 미술의 원조인 비잔틴 본토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자이크 미술의 정수로 꼽힌다. 성경 이야기의 주요 장면들을 세심히 재현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과연 옛 사람들에게 천국의 앞마당에 와 있는 느낌을 주고 남았겠다. 훗날 십자군 원정길에 북아프리카에서 전사한 프랑스 왕 루이 9세(성루이・1214~1270)의 유해가 프랑스로 옮겨가기 전 한때 이곳에 묻혔었다.
차분한 15세기 건물 아바텔리스 궁(Palazzo Abatellis)에 시칠리아 주립미술관(Galleria Regionale della Sicilia)이 있다. 초입의 대형 벽화 〈죽음의 승리(Trionfo del Morte)〉가 시원 섬뜩하고,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1430~1479)의 〈수태고지 받은 성처녀(Virgine Annunciata)〉는 성처녀 얼굴 묘사에 전에 못 보던 섬세함과 친근함이 마음에 와닿는다.
—양반의식이 심한 사람도 있잖아요. 깔보거나 누구에게나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그게 참을 수 있는 범위까지죠. 나는 왕족 출신이라 해서 왕이 없는 현대에서 상대가 평민 출신이니까 그 사람을 깔본다면 정상은 아니죠. 지속적으로 심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은 병자라고 하죠. 약간 자기의 존재가치를 높일 만한, 잘생겼다든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잘했다든지 키가 좀 크다든지, 그래 봤자 몇 센티미터 차이지만, 그런 여러 가지 속성이 있겠죠. 우리가 용납하고 재밌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차이는 괜찮아요. 그게 지나쳐서 많은 사람이 이해되지 못할 그런 행태나 언행을 보인다면 그게 문제죠. 그런 사람을 일러서 사회화가 아직 덜됐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회화가 잘된 인물이 모두 훌륭하다는 뜻은 아닙니다.”(웃음) —현대문학상 수상작 《내 고운 벗님》은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남자들의 관심사인 낚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남자들의 이야기인데, 낚시를 좋아하세요. “해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우연히 낚시를 하러 간 적이 두어 번 있는데, 한 30분 앉았다 왔을 거예요. 물론 아무 것도 못 잡았죠. 그런데 그때 낚시꾼들이 하는 얘기가 무척 재미가 있었어요. 아마도 낚시에 대해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재밌게 들린 것 같아요.” —30분을 앉아서 낚시꾼 이야기를 듣고 소설적 영감이 생긴 거네요. “그렇죠. 한 편이 아니라 여러 편이 나왔죠. 《내 고운 벗님》에 다 쓰지는 않았지만, 다른 작품에 변형이 돼서 들어갔어요. 사냥에 대해서도 쓴 게 있는데 사냥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내가 재미있어 하면서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소설에는 그런 식의 것들이 많아요.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친구들, 법조계·세무 공무원·교사 등등 다양한 전문 직업군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 세계 이야기를 심상하게 말하는데, 아 이건 재밌겠다 하는 그런 것들이 얻어걸리는 거죠. 그런 걸 가지고 쓰는 거예요. 낚시와 사냥이라는 도구, 그런 건 인간이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회적 존재인가를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약간 자기의 존재가치를 높일 만한, 잘생겼다든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잘했다든지 키가 좀 크다든지, 그래 봤자 몇 센티미터 차이지만, 그런 여러 가지 속성이 있겠죠. 우리가 용납하고 재밌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차이는 괜찮아요. 그게 지나쳐서 많은 사람이 이해되지 못할 그런 행태나 언행을 보인다면 그게 문제죠. 그런 사람을 일러서 사회화가 아직 덜됐다고 합니다.
두 차례 ‘혁명’을 거치면서 키르기스스탄은 ‘민주화’되고, 국민의 ‘삶의 질’은 개선됐을까.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다. 경제 부문을 보면 혁명 이전보다 개선됐다고 판단할 수 있는 지표를 찾기 어렵다. 국내총생산이 연평균 10% 가까이 증가했지만, 이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매년 물가가 상승해 실질적인 경제 성장 효과는 크지 않다. 민주화 수준도 개선되지 않았다. 1980년부터 세계 각국의 민주화 지수를 발표하는 미국의 비정부기구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튤립 혁명’ 직전 연도인 2004년 당시 키르기스스탄의 민주화 점수는 5.67, 2018년 현재는 6.07이다. 프리덤하우스는 점수가 ‘7’에 가까울수록 해당 국가의 민주화 수준이 낮은 것으로 해석한다. 이를 감안하면,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두 차례 ‘혁명’을 거치면서 ‘퇴보’한 셈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이전보다 시민사회 역량, 독립 언론의 자유, 사법부 독립성은 악화됐다. 부정부패도 증가했다. 선거 과정의 공정성만이 소폭 개선됐을 뿐이다. 특히 두 차례 ‘민주혁명’을 거쳤는데도, 키르기스스탄의 언론 자유는 갈수록 위축됐다. 일례로 2005년 ‘튤립 혁명’ 이후 알렉산드르 김은 《석간 비슈케크》 되찾아 키르기스스탄 유력 일간지 두 곳을 경영했지만, 아탐바예프 정권 시절 다시 지배력을 잃었다. 알렉산드르 김의 《석간 비슈케크》는 2015년 당시 현직 대통령 아탐바예프의 형에 대한 비리 의혹을 고발하는 기사를 내보냈는데, 해당 보도 이후 아탐바예프의 형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탐바예프는 형의 사인(死因)을 《석간 비슈케크》의 악의적인 보도라고 주장하면서 고소했고, 《석간 비슈케크》 역시 아탐바예프를 맞고소했다. 이런 와중에 아탐바예프 후원자이자 《석간 비슈케크》의 전 대주주 알렉산드르 류부시킨이 신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소를 제기했다. 법원은 류부시킨의 손을 들어줬다. 알렉산드르 김이 2005년 당시 경영권을 되찾는 과정이 위법했다고 판단한 셈이다. 참고로, 키르기스스탄의 판사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알렉산드르 김 측은 법원의 결정을 아탐바예프의 ‘언론 탄압’이라고 여겼다.
두 차례 ‘혁명’을 거치면서 키르기스스탄은 ‘민주화’되고, 국민의 ‘삶의 질’은 개선됐을까. 경제 부문을 보면 혁명 이전보다 개선됐다고 판단할 수 있는 지표를 찾기 어렵다. 국내총생산이 연평균 10% 가까이 증가했지만, 이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매년 물가가 상승해 실질적인 경제 성장 효과는 크지 않다.
포의 부위는 등골뼈와 두 신장 사이(디스크 부위)에 있으며 다섯 가지 색깔이 있는데 왼쪽은 청색이고 오른쪽은 흰색, 위는 붉은색, 아래는 검은색, 가운데는 노란색이라 하였다. 그리고 삼초의 부위는 심장 아래 위의 위에 상초가 있고, 중초는 배 가운데(중완)에 있으며, 하초는 배꼽 아래 방광의 입구에 있으며 깨끗함과 더러움을 주관한다 하였다. 몸 전체로 보면 머리에서 심장까지가 상초이고 심장에서 배꼽까지가 중초이며 그 아래가 하초이다. 포와 삼초의 기능은 남자의 경우 포는 정(精)을 간직하고 여자는 잉태를 주관하며, 삼초에서 상초는 폐와 심장의 호흡작용을 돕고 중초는 비위의 소화작용을 도우며, 하초는 생식과 배설작용을 돕는다. 근대의학에서는 임파의 작용으로 보고 심장, 혈관, 혈액 등의 순환기를 원활히 하는 제2의 생명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포에 병이 있을 때의 증상은 이와 같다. 포는 거의가 여성 질병을 일으키는데 대부분 월경에 속한다. 월경의 색깔이 자주색이면 열 때문인데, 색깔이 검으면 열이 매우 많은 증세이다. 월경 양이 적은 원인은 설사를 했거나 땀을 많이 흘리고 소변이 많아서 진액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고, 양이 많은 원인은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대변을 잘 못 보는데 땀이 말라서이다. 월경이 고르지 못해 열이 나거나 통증이 있는 증세는 모두 삼초가 허약해져서이다. 그리고 삼초에 병이 든 증세는 배 속이 그득하고 아랫배가 부어서 단단하여 소변을 보기 어려워 고통스럽다. 이러한 증세에 좋은 음식은 고소한 맛, 떫은 맛, 구린 맛, 탄내 나는 맛이다. 약재는 월경이 순조롭지 않으면 당귀 망초(芒硝, 후박나무)가 좋고, 포가 막혀서 하혈을 할 때는 황금(黃芩) 건지황(乾地黃) 익모초(益母草) 목단피(牧丹皮)가 좋다. 황기, 연뿌리, 참기름, 인삼, 오미자, 청귤 등은 삼초를 건강하게 한다. 이러한 약재는 남성에게도 적용된다. 모두 가루 내 티스푼 하나 가득 물에 타거나 달여서 차처럼 마시면 삼초가 건강해진다. 다음 회에서는 심장병과 심장이 원인인 중풍 암 등의 질병을 예문을 들어서 진단하고 예방과 치료법을 소개하기로 하고 이 장을 맺는다.⊙
포와 삼초의 기능은 남자의 경우 포는 정(精)을 간직하고 여자는 잉태를 주관하며, 삼초에서 상초는 폐와 심장의 호흡작용을 돕고 중초는 비위의 소화작용을 도우며, 하초는 생식과 배설작용을 돕는다. 근대의학에서는 임파의 작용으로 보고 심장, 혈관, 혈액 등의 순환기를 원활히 하는 제2의 생명이라고도 한다.
지자체의 지원과 개입이 없이도 우리 사회에는 자생적으로 이러한 마을 만들기 활동을 시작한 사례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윤구병 선생이 1995년에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에서 시작한 ‘변산 생활 공동체’가 있다. 처음에는 유기농 중심의 농사 위주의 공동체 활동에 집중하였지만, 1997년부터는 변산 공동체 학교를 개설하여, 오전에는 국어, 영어, 수학 등의 기본지식에 관한 학습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농사일, 집짓기, 음식 만들기 등과 같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살림 공부를 가르쳤다. 변산 생활 공동체는 크게 두 개의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밥상 공동체로 모두 8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50명으로 구성된 20가구의 마을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모습은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기초생산 공동체를 이루면서 상호 협력하고 공생하는 길을 찾아가는 아주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손색이 없다. 향후 변산 지역 1000가구의 4000~5000명의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 참여하게 된다면, 윤구병 선생의 소망처럼 지속가능한 미래를 지켜낼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 즉 땅과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풍성하게 지속되는 새로운 마을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을 공동체가 변두리 시골 지역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도심 속 마을에서 호혜와 연대활동을 통해 따뜻하고 착한 경제활동이 도시 안에서 실천된 곳이 바로 ‘성미산 마을’이다. 이곳은 서울 마포구 성미산 일대의 지역주민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도시형 공동체로서 도심 속에서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성미산 마을은 1994년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2500여 가구가 참여하는 제1호 마을기업인 ‘마포두레 생활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으며, 12년 과정의 대안학교를 개설하였고, 유기농 가게이자 마을 사랑방인 ‘동네부엌’과 마을 카페인 ‘작은나무’, 동네방송국인 ‘마포FM’ 등을 지역주민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다. 특히 성미산 마을극장은 건물의 지하공간을 극장으로 변환시킨 곳으로 그 공간을 통해 연극, 콘서트, 미술전시, 영화상영, 회의 등을 상시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소위 마을 사람들의 공공영역이요, 놀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심 속 마을에서 호혜와 연대활동을 통해 따뜻하고 착한 경제활동이 도시 안에서 실천된 곳이 바로 ‘성미산 마을’이다. 이곳은 서울 마포구 성미산 일대의 지역주민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도시형 공동체로서 도심 속에서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성미산 마을극장은 건물의 지하공간을 극장으로 변환시킨 곳으로 그 공간을 통해 연극, 콘서트, 미술전시, 영화상영, 회의 등을 상시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소위 마을 사람들의 공공영역이요, 놀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왕건은 즉위 첫해(918년)부터 자신의 구상을 바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남방의 통일을 서두르지 않고 우선 북방정책부터 추진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은 “옛 도읍 평양이 황폐된 지 오래되어 터는 남아 있으나 가시나무가 우거지고 번인(蕃人)들이 그 사이에서 사냥하고 침략해 피해가 크니 마땅히 백성을 옮겨 살게 해 변방을 튼튼히 하라” 하고 황주, 풍주, 해주, 백주, 남주(연안)의 여러 고을 백성을 평양에 살게 해 대도호부를 만들고, 그의 당제(唐帝)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 열평(列評)을 보내어 지키게 했다. 평양성이 완성되자 왕건은 고관의 자제와 여러 군현의 양가자제들도 서경(西京·평양)으로 이주시켰으며 왕건 자신도 자주 서경을 순행하고 성곽을 계속 쌓는 한편, 학교와 관부를 건설해 수도 개성과 격을 같이해 나갔다. 훗날 왕건은 “삼한을 평정하면 장차 서경에 천도하겠다”고도 했다. 이러한 왕건의 북방정책은 우선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수복하고 제2의 수도로 함으로써 고구려 계승과 발해와의 통일을 염두에 둔 첫 번째 구체적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왕건은 즉위한 918년부터 삼국통일을 이룬 936년 기간 중 12차례 서경을 순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북 방면(함경도)에 대해서는 포용전략으로 접근했다. 삭방의 골암성주(骨癌城主) 윤선(尹瑄)이 투항해 옴(918년)으로써 이 방면 진출에 진전을 보였다. 그는 궁예의 박해를 피해 골암성(안변부근)으로 가서 이 지역에 잡거하던 흑수(黑水) 등 이민족을 규합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오던 사람으로 동북 변경의 사정과 이민족에 관해 정통한 인물이었다. 또한 922년에는 명주의 장군 순식(順式)이 내부(內附)해 옴에 따라 왕건은 그를 크게 우대하고 국성인 왕(王)씨 성을 하사해 중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흑수 말갈 추장도 170명을 데리고 귀화했다. 또한 동북 방면 평주 출신 장군 유금필(庾黔弼)은 3000명을 이끌고 골암에 진주해 그곳의 말갈 부족을 복속시키고 고려인 포로 3000명을 돌려보냈다.
평양성이 완성되자 왕건은 고관의 자제와 여러 군현의 양가자제들도 서경(西京·평양)으로 이주시켰으며 왕건 자신도 자주 서경을 순행하고 성곽을 계속 쌓는 한편, 학교와 관부를 건설해 수도 개성과 격을 같이해 나갔다. 훗날 왕건은 “삼한을 평정하면 장차 서경에 천도하겠다”고도 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이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청와대의 주인은 청와대 앞 잔디밭에 앉아 출입기자들과 얘기를 나눴다. 이날 주제를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국회의원이 되려 해도 논두렁 정기는 타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풀어 보면 “국회의원도 논두렁 정기를 타고나야 하는데 대통령을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 하고 싶다고 아무나 오르는 자리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이분이 정말 ‘논두렁 정기’를 타고났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필자는 경남 합천(陜川)의 황강 옆에 있는 전씨의 생가 및 선영을 살펴보았다. 황강의 물굽이를 내려다보는 산등성이에 있는 그의 부모 묘소는 현직 대통령의 선영답게 잘 정돈되어 있었으나 필자는 안타깝게도 생기처를 찾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부모 묘소의 청룡이 역(逆)의 형세를 보여 꺼림칙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감옥에 가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재앙을 겪었다. 다만 부모 묘소에서 얼마간 떨어진 산등성이의 4대조 묘소에는 강한 생기가 나왔다. 이것이 평범한(?) 군인을 청와대의 주인으로 밀어올린 힘의 원천으로 보인다. 이 묘소는 드물게도 구들장을 봉분으로 두른 독특한 양식이다. 연구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모 묘소의 청룡이 역(逆)으로 치받는 데다 묘소에서 바라보이는 황강의 물줄기가 빠져나가는 형세 등으로 미루어 수난이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갑자기 ‘논두렁 정기’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총선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흔히 ‘정치는 생물’이라고들 한다. ‘생물’이란 ‘살아 있는 존재’를 일컫는데 무릇 살아 숨 쉬는 것은 어디로 튈지 불가예측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사주 관상을 보는 등 명리학(命理學)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심정으로 풍수지리학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도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 둔다. 궁극적으로 국가 민족을 위해 공헌하지 않고 개인의 출세나 발복에 초점을 둔 어떤 행위도 3대를 넘어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경험칙이기 때문이다.
총선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생물’이란 ‘살아 있는 존재’를 일컫는데 무릇 살아 숨 쉬는 것은 어디로 튈지 불가예측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사주 관상을 보는 등 명리학(命理學)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심정으로 풍수지리학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도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 둔다.
이윽고 1989년 봄 본격 수사에 돌입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동안 축적한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곧바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한 것이었다. 수개월에 걸친 치열한 준비를 통해 다양한 투기 행태와 해당 투기꾼들에 대한 사전 수사가 이미 상당히 진행된 덕분이었다. 가장 먼저 잡아들인 대상은 직업적인 투기꾼들이었다. 부동산 거래가 이뤄지는 현지에서는 흔히 ‘떴다방’으로 불리는 무허가 복덕방 업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레저, -개발, -기획, -유통 등 버젓이 위장 간판을 내건 회사를 차려놓고 전국을 무대로 투기를 일삼았다. 전문 투기꾼인 사장 밑에 적게는 10여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르는 ‘일꾼’을 거느린 투기 조직이었다. 투기 행태도 다양했다. △개발 예정지에 자기 회사의 일꾼들을 미리 이주시켜 헐값에 땅이나 주택을 매입한 뒤 이를 복부인 등에게 팔아넘겨 폭리를 취하거나 △개발 계획이 전혀 없는 지역이 개발될 것이란 헛소문이나 유언비어를 퍼뜨려 투기를 유인한 뒤, 자신들이 미리 확보해 둔 부동산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아먹거나 △헐값에 부동산을 사들인 뒤 이를 등기(登記)하지 않고 남에게 팔아넘기는, 미등기 전매로 흔적 없이 차익(差益)을 챙기고 탈세를 자행했다. 또 아파트 분양권(이른바 딱지)이나 주택청약 예금통장을 편법으로 사들이거나, 그렇게 사들인 딱지나 통장을 다른 사람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기기도 했다. 한탕을 노린 이른바 복부인이나 일반 투기꾼도 적지 않았다. 개발 예정지나 이미 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에는 어김없이, 그곳 부동산을 거래해선 안 되는 외지인들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편법, 탈법으로 어떻게든 현지인 자격을 얻어낸 뒤 해당 지역의 부동산 거래에 뛰어들어 개발이익을 노렸다. 부동산 개발 정보를 빼돌리거나 투기꾼들과 유착한 몇몇 하급 공무원들도 검거했다. 부동산 투기를 위해 회사 자금을 빼돌린 기업주들도 있었다. 물 반 고기 반, 손만 뻗치면 금방 잡아들일 수 있을 만큼 투기꾼들은 아예 드러내놓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잡아들인 대상은 직업적인 투기꾼들이었다. 부동산 거래가 이뤄지는 현지에서는 흔히 ‘떴다방’으로 불리는 무허가 복덕방 업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레저, -개발, -기획, -유통 등 버젓이 위장 간판을 내건 회사를 차려놓고 전국을 무대로 투기를 일삼았다. 전문 투기꾼인 사장 밑에 적게는 10여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르는 ‘일꾼’을 거느린 투기 조직이었다.
호찌민은 1920년 여름 어느 날 프랑스의 《뤼마니떼》에 실린, 제2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레닌이 발표했던 〈민족과 속지문제에 관한 강령〉을 접했다. 그의 전집에 의하면, “그는 이 강령을 수십 번 반복하여 읽은 후에 흥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방에 앉아 마치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처럼 큰소리로 ‘압박받는 동포여!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해방에 절대 필요한 이정표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호찌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인류 지혜의 정화(精華)와 정상(頂上)이자, 착취 계급을 분쇄하고 노동자·농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유일한 사상과 무기라고 신봉하게 되었다. 1921년 2월에 프랑스공산당이 창당되자 그는 당원이 되어 인도차이나인으로 첫 번째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로써 그의 애국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합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의 민족해방론은 이후 소련과 중국 등지에서의 이론 학습에 따라 더욱 체계화되었다. 호찌민은 1925년 6월 베트남공산당의 전신(前身)인 월남청년혁명동지회(약칭 ‘청년’이라 함)를 중국의 광주에서 세웠다. 청년은 활동목표를 프랑스 제국주의와 봉건제도, 그리고 자본주의를 타도하여 노동자·농민·병사의 정권을 세우는 것과 이어 세계의 공산화를 위해 압박받는 민중과 무산계급과의 연합에 두었다. 1930년 2월 3일에 베트남공산당이 홍콩에서 설립됐다. 이 무렵 유산자(有産者) 계급의 대표 정당으로서 독립운동의 한 축을 주도하던 베트남국민당이 와해됐다. 베트남공산당은 이때부터 베트남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됐다. 베트남공산당은 활동 과정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한 민중·민족 혁명세력을 결집하는 차원에서 일시 해체하기도 하였다. 1945년 11월 베트남공산당은 이러한 전략에서 해산하는 대신 전위(前衛)조직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월맹)을 건설했다. 냉전시대에 우리가 북베트남을 ‘월맹’이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1951년 2월 베트남공산당은 베트남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립되었다가 통일 이듬해인 1976년 베트남공산당으로 개칭했다.
호찌민은 1920년 여름 어느 날 프랑스의 《뤼마니떼》에 실린, 제2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레닌이 발표했던 〈민족과 속지문제에 관한 강령〉을 접했다. 이때부터 호찌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인류 지혜의 정화(精華)와 정상(頂上)이자, 착취 계급을 분쇄하고 노동자·농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유일한 사상과 무기라고 신봉하게 되었다. 1921년 2월에 프랑스공산당이 창당되자 그는 당원이 되어 인도차이나인으로 첫 번째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냥 악을 쓰고 무작정 희생하면서 일본 군대의 신식 총과 대포 앞에 쇠스랑과 대창을 들고 맞서다가 죽는 것은 열강의 관심을 터럭만큼도 끌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서양의 힘센 나라들, 저들도 일본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도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자라서 일본 군대에 실질적인 타격을 가할 때는 저들의 태도가 백팔십도로 달라질 것입니다. 힘이 없어 구걸하는 민족을 도울 나라는 없습니다. 힘을 길러 실질적으로 일본 군대를 타격할 만한 군대를 가져야 합니다.” 강창두가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강한 군대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었다. 병력의 招募(초모)와 군자금의 확보를 위해 지금보다 배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지금까지는 의병의 군자금으로 한성을 비롯한 국내에서 큰돈이 흘러 들어왔지만 앞으로는 그 루트가 일제의 봉쇄로 막히게 될 것인즉 간도와 연해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식산을 장려하여 장차 항구적인 의병자금의 원천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데에도 이견이 없었다. 일본이 러시아의 차르 정부를 강압하여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땅에 있는 한국 의병들에게 무기를 판매하지 않도록 집요하게 노력하고 있으므로 차제에 무기의 구입선을 다원화해야 한다는 전략적인 문제도 검토되었다. “중대한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안중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국인 2000만이 그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그 말을 듣기만 해도 스스로 일어나 일제에 항거하여 싸우도록 이끌어주는 역사적인 사건이, 신화가 있어야 합니다. 화랑 관창의 죽음이 신라군의 승리를 이끌었듯이, 예수가 죽어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였듯이 우리 민족에게도 메시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미 한국을 보호의 미명 아래 속국으로 만들었으나 조만간 완전히 국가의 이름마저 말살해 버릴 것인즉, 국권회복운동은 어쩌면 백년, 혹은 그보다 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진행될 것인즉, 그 오랜 세월을 통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교훈을 주고 전범이 될 만한 거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악을 쓰고 무작정 희생하면서 일본 군대의 신식 총과 대포 앞에 쇠스랑과 대창을 들고 맞서다가 죽는 것은 열강의 관심을 터럭만큼도 끌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서양의 힘센 나라들, 저들도 일본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도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자라서 일본 군대에 실질적인 타격을 가할 때는 저들의 태도가 백팔십도로 달라질 것입니다. 힘이 없어 구걸하는 민족을 도울 나라는 없습니다. 힘을 길러 실질적으로 일본 군대를 타격할 만한 군대를 가져야 합니다.” 강창두가 말했다.
간담의 에너지에 대하여 《황제내경》과 《동의보감》의 기록은 이러하다. 간은 봄과 아침과 통하고 음중의 양(少陽)이며, 동쪽에서 풍(風)이 일어나고 풍은 목(木·간담)을 낳는다 하였다. 이 말은 사계절과 하루에 있어서 봄과 아침의 에너지가 간담의 크고 작음 내지 강약성쇠를 확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작고 약한 간의 병은 아침에 아픔이 덜하고 봄에 병이 낫는다 하였다. 그리고 간이 크고 실하면 봄에 간에 병이 드는데 이는 크고 실한 장부에 반드시 병을 유발하는 사기(邪氣)가 정체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범띠 해의 봄과 아침의 에너지인 인(寅), 토끼띠 해인 묘(卯)년에 태어나고 생월이 음력 1월 입춘 인(寅)이나 2월 경칩 묘(卯)이면 간담이 크고 실한 것이다. 그러나 오장육부는 자연계의 먹이사슬처럼 상생하고 상극한다. 신장 방광이 간담을 돕고, 폐 대장이 간담을 억압한다. 따라서 폐 대장의 에너지인 잔나비띠(申) 닭띠(酉)가 생월이 음력 1월(寅)이나 2월(卯)이면 간이 작고 허약하다. 이는 오행의 논리로서 목(木)은 간담의 에너지이고 금(金)은 폐 대장의 에너지이며 금(金·쇠)이 목(木)을 이긴다는 자연계의 현상을 적용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논리가 바로 그러하거니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만물이 다 물질이기 때문에 자연계 현상과 조금도 다르지가 않다. 그러면 실질적인 체질진단과 치료법을 알아보자. 1962년 음력 7월 1일 0시에 태어난 남성의 예이다. 1962년 그해는 하늘에서는 물(水)이 지배하고 땅에서는 간담의 에너지인 범띠 인목(寅木)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간담을 풍(風)이라 하는데 인(寅)의 해는 바람이 세고 많이 분다. 풍은 간담을 낳고 신맛이 간담을 자양한다 하였는데 이런 해는 신맛 성분이 많은 식물이 잘 자란다. 아무튼 이 남성의 생월에 하늘은 흙(土)의 에너지가 지배하고 땅에서는 폐 대장에 속하는 원숭이띠 신(申·음력 7월 입추), 금(金)의 에너지가 지배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태어난 그날 역시 폐 대장의 에너지가 왕성한 닭띠 유(酉), 금(金)이 지배하는 날이고 생시의 하늘 기운은 활활 타오르는 불(火)이 지배하고(이것을 丙이란 문자로 표시한다) 생시의 에너지는 물(水)이 지배하는 쥐띠 자(子)시였다. 이것을 하나의 진단공식으로 집약하면 이와 같다.
간은 봄과 아침과 통하고 음중의 양(少陽)이며, 동쪽에서 풍(風)이 일어나고 풍은 목(木·간담)을 낳는다 하였다. 이 말은 사계절과 하루에 있어서 봄과 아침의 에너지가 간담의 크고 작음 내지 강약성쇠를 확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작고 약한 간의 병은 아침에 아픔이 덜하고 봄에 병이 낫는다 하였다. 그러니까 범띠 해의 봄과 아침의 에너지인 인(寅), 토끼띠 해인 묘(卯)년에 태어나고 생월이 음력 1월 입춘 인(寅)이나 2월 경칩 묘(卯)이면 간담이 크고 실한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을 수첩공주라고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요. “우리는 늘 박근혜 정치에 대해서 수첩공주다, 수첩 보고 한다(고 낮잡아본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이회창 시대 30% 중반의 지지율, 지금 새누리당은 40% 중반 지지율을 갖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지지율을 갖고 있다고 했을 때 단순히 수첩공주라고 깎아내리는 것보다는 박근혜를 넘어선 우리의 어떤 대안, 우리의 수권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율이 새누리당과 비교했을 때 20%P 정도 차이가 나는데요. 민주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지지율 회복에 대한 고민을 좀 하고 계신가요. “많은 고민을 합니다. ‘대중의 트렌드(Trend)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과거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가’ 등을 분석하는데 새정치민주연합이 솔루션(Solution) 있는 정당이 될 수 있게 좌파적 솔루션을 많이 제시하려 합니다.”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항상 지금이 선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행동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 당 사람들이 가진 두 가지 잘못된 편견이 있는데 첫 번째는 ‘우리의 지지율은 20%지만 선거 때가 되면 30% 초중반대까지는 간다’이고, 두 번째는 ‘새누리당이 유지하는 지지율 40%는 견고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제가 10년 전부터 한 얘기가 ‘중도유권자들은 특별히 이념적이지 않다’입니다. 중도유권자들은 정당의 정책 결정 신속성, 공고성, 일관성, 책임성 등을 봅니다. 거기에 우리가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현 정권에 대해 단순히 비판하고 공격하고, 실정을 파헤치는 것만으로 우리가 집권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수권정당으로 비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솔루션을 갖는 정당으로 국민에게 비쳐야 합니다. 그리고 보통 일반적인 국민하고 아주 활성화된 소수가 있는데요. 가령 인터넷은 1%가 글을 올리고 9%가 댓글을 올리고 90%가 관망을 하는데, 1~9%의 소수의 목소리와 관망하는 다수 90%의 목소리를 어떻게 반영할 것이냐 하는 고민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박근혜 정치에 대해서 수첩공주다, 수첩 보고 한다(고 낮잡아본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이회창 시대 30% 중반의 지지율, 지금 새누리당은 40% 중반 지지율을 갖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지지율을 갖고 있다고 했을 때 단순히 수첩공주라고 깎아내리는 것보다는 박근혜를 넘어선 우리의 어떤 대안, 우리의 수권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최근에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저용량 또는 초저용량 여성호르몬 대체요법을 사용하는 추세이고, 질 건조증이나 가려움증을 치료하기 위해 원하는 부위에 크림 형태의 약을 바르는 저용량 국소치료가 권장된다. 물론 유방암의 가족력, 이를테면 어머니와 자매들 등이 유방암을 앓은 적이 있는 사람이나 임신과 수유를 한 적이 없는 사람 등 여성호르몬에 더 많이 노출된 적이 있는 사람 등 고위험군은 치료를 하지 말거나 신중해야 한다. 여성호르몬 대체요법으로 식물성 여성호르몬 치료를 하기도 하는데 승마 추출물, 달맞이 꽃 종자유, 당귀, 성요한 초목, 콩에서 추출한 이소플라본 등이 있다. 이런 생약 요법은 부작용이 거의 없지만 효과가 약하고 여성호르몬에 비해서 매우 비싸서 비용대비 효과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다. 최근에는 태반주사요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태반 추출물에는 성장호르몬, 남성호르몬, 여성호르몬 등 여러가지 호르몬들의 분비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여성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하므로 폐경기 전후 여성에게 효과적이다. 태반에는 피부 상피세포 재생인자로 인한 피부 재생 효과, 멜라닌 색소 억제로 인한 미백효과, 간세포 재생인자로 인한 피로감소, 활력증진 효과도 있어 갱년기 치료는 물론 노화방지 목적을 겸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여성호르몬이 감소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변화 중에 복부지방의 증가와 피부 탄력의 저하도 여성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작용한다. 여성호르몬은 몸속의 지방을 복부는 물론 엉덩이, 허벅지, 팔뚝 등에 골고루 분포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 여성호르몬이 없어지면 골고루 분포하던 지방이 모두 복부로 몰려서 남성형 비만, 즉 배만 볼록 나오는 복부비만이 심해진다. 이런 변화는 파트너의 성적 흥분을 감소시키고 본인 스스로도 성생활에 있어서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폐경 이후 소위 말하는 ‘똥배’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다이어트와 운동은 기본이고 여성호르몬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 폐경 후 복부비만이 심해지는 원인으로는 성장호르몬의 감소가 원인이 된다.
여성호르몬 대체요법으로 식물성 여성호르몬 치료를 하기도 하는데 승마 추출물, 달맞이 꽃 종자유, 당귀, 성요한 초목, 콩에서 추출한 이소플라본 등이 있다. 이런 생약 요법은 부작용이 거의 없지만 효과가 약하고 여성호르몬에 비해서 매우 비싸서 비용대비 효과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다.
정태하 소장의 능숙하고 신속한 대처로 원자로 탱크의 균열을 신속히 복구했다. 그러나 제너럴 어토믹은 원자로 계통만 공급하기로 돼 있었고, 2차 계통인 배관 계통은 우리가 자력으로 설계와 시공을 끝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연구소 내분으로 그동안 원자로 공사의 주축을 담당했던 윤세원, 김태봉 핵심 부장 인력들이 해임돼 그 공백이 컸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당초 설계에는 원자로 건물 내부의 열교환기만 포함돼 있었고, 외부 냉각타워가 빠져 있던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외부 냉각타워는 원자로에서 빠져나온 뜨거운 냉각수를 전동팬으로 강제 냉각해 열을 대기로 방출하는 공랭식 냉각장치다. 이관(李寬) 연구관과 장근수(張根秀) 연구관의 주도로 냉각타워를 설계하고 자체 제작도록 했다. 그해 10월 원자로 건물 외부에 설치하고 있던 냉각타워 공사가 완료돼 냉각계 시험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때 원자로는 제너럴 어토믹사와 공급계약에 의해 도입한 것이라 우리 측에 설계도면을 넘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장지영(張志瑛) 연구관 등은 미국 측 기술진이 퇴근한 후 원자로 부품 하나하나와 설치절차 및 연결상태 등을 일일이 스케치했다고 한다. 원자로실 크레인도 이병호(李炳昊) 연구관이 최초설계를 보완해 다시 제작했다. 두 달간의 숨가쁜 사투가 이어졌다. 원자로 설치 준비가 비로소 끝난 것이다. 1962년 1월 18일, 제너럴 어토믹사의 원자로 엔지니어인 존 배치(John Batch)가 원자로 최종 조립을 위해 방한했다. 존 배치는 1961년 9월에도 원자로 조립을 위해 왔으나, 우리 측 담당 부분이 너무 미흡하다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연구소 연구관들은 존 배치를 도와 송요택(宋堯澤), 이병호, 이관, 장근수, 장지영 연구관 등이 기계설치에 참여했고, 운전제어실의 설치와 계측제어장치의 실험은 김종련(金鍾鍊) 연구관이 참여했다. 정태하 소장과 연구관들은 매일 자정 무렵까지 야근을 하고 철야도 불사했다. 존 배치는 2개월여 동안 한국에 머물며 그해 3월 18일 원자로 설치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단 5개월의 공기(工期)로 계획한 원자로 건설공사를 내분과 사고 등으로 7배의 시간이 더 걸려 장장 2년8개월 만에 완료한 것이다.
그해 10월 원자로 건물 외부에 설치하고 있던 냉각타워 공사가 완료돼 냉각계 시험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때 원자로는 제너럴 어토믹사와 공급계약에 의해 도입한 것이라 우리 측에 설계도면을 넘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장지영(張志瑛) 연구관 등은 미국 측 기술진이 퇴근한 후 원자로 부품 하나하나와 설치절차 및 연결상태 등을 일일이 스케치했다고 한다.